이수빈
“그러니까, 다시는 꿈을 꿀 수 없게 된다고.”
“그게 병도 아닌데 왜 무서워?”
“바보야, 너는 꿈을 뺏기는 거야, 영원히. 네가 꾸고 싶어도!”
“아닌데? 우리 엄마가 어른 되면 다 할 수 있댔어. 노는 것도, 늦게까지 안 자는 것도. 난 어른 되면 백만 구독자 먹방 유튜버 돼 있을걸?”
연우와 김승준이 좀비 꿈 이야기로 아침부터 싸우고 있었다. 좀비 꿈은 요즘 SNS에서 유행처럼 후기가 올라오는 꿈이다. 어떤 사람은 코끼리, 어떤 사람은 엄마, 어떤 사람은 돈다발, 어떤 사람은 친구…. 종류는 다르지만, 사람들은 꿈에서 뭔가에 쫓기다가 물어뜯겼다. 그렇게 먹히는 꿈을 꾸고 나면 갑자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다시는 꿈을 꾸지 않게 된다고 했다. 좀비, 귀신, 아무튼 무서운 것한테 쫓기는 건 질색이다. 나는 달리기도 느린데다 쫓기는 게 싫어서 애들이랑 술래잡기도 안 하는데, 꿈에서라고 잘 달릴 리가 없다.
“야, 임수정 좀비 꿈 꿨대!” 뒷문을 보니 수정이가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수정이는 자리로 가 책을 폈다.
매일 스트레칭을 해야 한다며 창틀을 붙잡고 다리를 찢던 수정이인데,
뭔가 이상했다. 오늘은 스트레칭 안 하냐는 김승준의 질문에 수정이는 흥, 웃으며 우리에게 책 표지를 보여줬다. ‘초등학생을 위한 주식 기본서’라는 제목이 보였다.
“너 발레리나 할 거라며?” 연우가 물었다. “하고 싶다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난 현실을 볼 줄 알게 된 것뿐이야.” 수진이의 말에 김승준이 감탄했다. “오, 너 되게 어른스러워졌다.” 연우가 김승준을 째려봤다. 선생님이 꿈인 연우는 김승준이 눈치 없이 행동할 때마다 잔소리해서 둘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그때마다 둘을 말리는 건 언제나 나였다.
이번엔 둘을 말리는 대신 내 필통을 꽉 쥐었다. 잘 부러지는 연필을 보관하라고 엄마가 솜도 넣어 만들어 준 필통이다. 나는 불안할 때면 왼손에 필통을 꽉 쥐고 오른손으로는 내가 만든 개구리 캐릭터 ‘행굴 씨’를 그린다. 행굴 씨는 네잎 클로버 머리핀을 달고 연잎 위에 누운, 웃는 개구리 캐릭터다. 6살 때 행굴 씨를 처음 그리자 엄마가 우리 딸은 분명 천재 화가가 될 거라며 칭찬해준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날부터 쭉 내 꿈은 화가였다. 행굴 씨는 나와 함께 쑥쑥 자라면서 이런저런 설정이 생겼다. 하트 모양 클로버 이파리를 먹고, 연잎에 누워서 쉬는 걸 좋아하고, 언젠가 친구가 생기면 연잎에 태워 드라이브를 시켜 주고 싶어 한다.
“만약 우리도 좀비 꿈을 꾸게 되면 어떡해?” 연우가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그럼 나 불러. 내가 좀비가 너희 못 물게 일단 붙잡아 볼게.” 김승준이 나와 연우를 보며 씩 웃었다. “바보야, 사람마다 다른 게 쫓아오는데 뭐가 달려들 줄 알고?” 연우가 쏘아붙였다. “뭐가 됐든 내가 막아준다니까? 대신 너네도 내가 부르면 달려오면 되지.” 김승준의 말에 연우가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했다. 나는 일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만한 김승준의 얼굴을 보니 왠지 덜 무서워지는 것 같았다.
덜 무섭다는 건 취소다. 침대에 눕자마자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좀비 꿈을 꾼다면, 날 쫓아오는 건 뭘까? 수정이는 발레복을 입은 곰이 쫓아왔다고 했다. 발레복을 입은 곰이라니, 웃길 것 같은데 그게 날 잡아먹는다고 생각하면 무섭기도 했다. 갑자기 발이 시린 것 같아서 이불 안에 발을 꼭꼭 숨기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잠들고 싶었지만 잠들 수가 없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벌떡 일어나 가방에서 필통을 꺼냈다. 푹신한 필통을 손에 꽉 쥐자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나는 필통을 쥔 채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떴는데도 세상이 어두컴컴했다. 여기가 내 방이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내 눈앞에 행굴 씨가 나타났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 큰 행굴 씨였다. 행굴 씨는 웃지 않았다. 웃지 않는 행굴 씨가 나에게로 달려와 내가 왼손에 쥔 필통을 뺏으려고 했다.
“싫어! 저리 가!” 나는 필통을 꼭 끌어안았다. 행굴 씨는 나를 할퀴기 시작했다. 발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물갈퀴가 달린 발가락이 내 팔을 스치자 팔뚝이 움푹 파이며 상처가 났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구멍이 날 것처럼 깊게 파인 게 무서웠다. 번뜩 김승준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떠오르는 대로 아무나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저멀리 잠옷 차림의 엄마가 나타났다. 뒤이어 잠옷 차림의 김승준과 연우도 나타났다. 모두 내 쪽으로 달려왔지만, 우리 사이에 유리 벽이 있는 것처럼 가로막혀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나랑 행굴 씨만 이 안에 있는 거였다. 나는 있는 힘껏 도망쳤다.
달리기가 느린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아야!” 바보같이 내 발에 내가 걸려 무릎부터 세게 넘어져 버렸다. 꿈인 걸 아는데도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행굴 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행굴 씨는 내 필통을 빼앗으려 했다. 좀비 꿈을 꾸면 무조건 나를 물어뜯어 버린다는데, 왜 필통에 집착하는 거지? 나는 내 손에 있는 필통을 빤히 봤다. 필통을 열어 연필을 꺼내자 행굴 씨가 다급하게 발을 뻗었다. 영화에서 본 적 있다. 이럴 땐 이게 여기서 탈출할 열쇠다. 그런데 뭘 그려야 하지? 나는 개구리의 천적을 떠올렸다. 부엉이? 독수리? 그래, 뱀! 뱀은 빠르게 그릴 수 있고, 개구리를 잡아먹을 수 있다. 나는 후다닥 연필을 허공에 대고 뱀을 그렸다. 내 예상대로 뱀이 나타났다. 뱀은 쉭쉭거리며 행굴 씨에게 다가갔다. 뱀이 행굴 씨를 물 때마다 행굴 씨의 몸에 상처가 났다. 나에게 난 것과 비슷하게 움푹 파여서 구멍이 날 것 같은, 깊은 상처였다. 행굴 씨는 점점 작아졌다. 뱀이 행굴 씨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행굴 씨와 내 눈이 마주쳤다. 행굴씨의 얼굴에도 할퀸 것 같은 상처가 가득했다.
“안 돼!” 나는 행굴 씨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내 뱀을 지워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행굴 씨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작은 행굴 씨가 나를 다시 쫓아 왔다. 행굴 씨가 계속 나를 할퀴었다. 나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엄마와 친구들 쪽을 쳐다봤다.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내 손가락의 상처가 사라졌다. 다시 고개를 들어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뺨의 상처가 사라졌다. 김승준과 눈이 마주치자 팔뚝의 상처가 사라졌다. 이젠 정말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허공에 연필로 하트 모양 클로버 이파리를 그렸다. 행굴 씨가 가장 좋아하는 이파리라 그런지 행굴 씨는 나를 쫓다 말고 이파리를 먹기 시작했다. 행굴 씨가 이파리를 먹자 행굴 씨의 몸에 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멍하니 행굴 씨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엄마가 나에게로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친구들도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투명한 벽은 어느새 사라진 듯했다. 이파리를 다 먹은 행굴 씨는 더는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나는 행굴 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행굴 씨가 슬쩍 발가락을 내밀었다. 말랑하고 축축한 발과 악수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행굴 씨에게서는 연필 냄새와 풀 냄새가 났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먼저 온 김승준과 연우가 어젯밤 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셋은 서로를 바라봤다. 나는 씩 웃었다. 만약 두 사람의 꿈을 물어뜯으려는 게 나온다면, 나도 그 꿈으로 가 옆에서 응원할 것이었다. 그런 건 우리의 꿈을 먹어 치울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자리에 앉아 또 행굴 씨를 그렸다. 행굴 씨의 연잎 위에 나도 함께 누운 그림을 그리자 시원하게 연잎 드라이브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뒷문으로 수정이가 들어왔다. 또 두꺼운 주식 어쩌고 책을 들고 바로 책상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발레복을 입고 다리를 쭉 뻗는 수정이를 그렸다. 수정이를 툭툭 치고 그림을 건넸는데, 수정이는 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난 너 유연한 거 멋있더라.” 내 말에 수정이가 수줍게 웃더니 그림을 받아서 꼬옥 쥐었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그림을 그렸다. 먹방 유튜버가 된 김승준, 선생님이 된 연우…. 그리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오늘따라 더 기분 좋게 귀에 울렸다.
이수빈
2024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매력 훔치기」가 당선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따뜻한 이야기로 수많은 독자에게 가 닿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