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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들

겨울눈의 기다림

글·그림곽다희

아이 울음이나 웃음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좋다. 높고 길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생명 그 자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기는 울산 바닷가 앞에 있는 대형 카페. 작은 발로 종종 걸어 다니던 아이가 내 가방에 달린 여우 인형이 마음에 드는지 곁으로 다가온다. 아이 엄마가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재빨리 작은 팔 사이에 손을 끼워 아이를 데려간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나도 저 아이처럼 작고 말랑한 시절이 있었겠지.

갓 태어난 내가 여물지 않은 성대로 울음을 터뜨렸을 때 엄마는 어떤 눈을 하고 있었을까?
어떤 삶을 살든 그저 행복하기만 하라고 조용히 속삭여줬을까. 지금 엄마에게 연락해서 이십여 년 전 기억을 묻기엔 부끄럽다. 대신 상상으로 찡해진 코끝을 느끼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양을 그려 본다.

내 전공은 환경공학과.01 환경을 지키겠다는 큰 꿈을 품고 학교에 입학했다가 환경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대학교 3학년에 환경 단체 활동가로 일을 시작했다. 졸업 후에는 환경을 주제로 문화 기획을 해왔다. 올해 초에는 중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자유학기제 환경 강사로 일했고, 내년 모집 공고를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은 주말 저녁에 편의점에서 일하고, 주말 낮과 평일에는 예술 단체 ‘지구숨숨’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재택근무하고 있다. 주로 해양 쓰레기를 주제로 예술과 접목한 환경 교육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한다. 지원사업 증빙 서류도 만들고, 회계도 한다. 아주 가끔, 원고 요청을 받아 글도 쓰고 있다.

내가 일하는 방식을 정확히 설명할 단어는 없다. 제일 가까운 단어로 프리랜서를 떠올리지만 거창한 느낌이다. 프리랜서도 분야가 있고, 직업이니까. 취미나 문화생활을 즐기고, 저축이나 투자도 하면서 생활을 유지할 만큼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분야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스스로 프리랜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놀고먹기만 하는 백수는 아니니 나를 ‘비정규직 단기 노동자’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당하겠다.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할 필요가 없으니 대학생 애인을 오전 수업에 데려다 줄 수 있어 기쁘고, 오전 열한 시의 햇살을 집에서 보고 만질 수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실컷 늦잠 잘 수 있어서 좋다. 부유하진 않지만 여유롭고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순간도 있다. 소중한 친구가 취업 소식을 알려오면 진심으로 기쁘면서 마음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다. 부르면 나가고, 부르지 않으면 뭐 해 먹고 살지 또 고민하는 나, 진짜 괜찮은 걸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누구보다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잘 내뱉지 않는, 기후 위기, 인권, 동물권, 생태계 같은 단어들을 쓰면서 지구와 삶을 지키기 위해 작은 행동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 나에게 격려와 환호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상치 못한 환대의 분위기에, 들끓는 에너지에 꽤 심취해 있었다. 기후 위기를 말하고, 공부하고, 글 쓰고, 친구들과 시위, 캠페인, 전시, 프로그램을 만들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나. 관계 맺고 표현하는 데 실수도 잦았지만 두 눈을 반짝이며 듣고, 개선하고, 성장하려고 애썼던 나는 지금 생각해도 멋있다. 한편으론 질투도 난다. 지금 나는 아주 심각하게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데, 사진 속 나는 얄미울 만큼 상쾌하게 웃고 있다.

스물일곱을 앞둔 요즘, 자주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들 바쁘게 좋은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데 혼자 안일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친했던 사람도, 좋아했던 사람도 멀게 느껴진다. 유복해 보이는 삶에도 분명 지옥 같은 순간이 있을 텐데, 나는 우물 위만 볼 수 있는 개구리라서 쉽게 억울해진다.

스물다섯까지는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뜻을 따라 살자고, 그 이후로는 번듯한 직장도 갖고, 부모님 호강시켜 주자고 다짐했는데 목표와 멀어져 있단 걸 자각할 때마다 식은땀이 흐른다. 전공인 공학과 멀어지고, 문화예술과 교육에 가까워진 나. 그렇지만 환경 운동가도, 기획자도, 디자이너도, 예술가도 아닌 어정쩡한 정체성. 부유하는 내 영혼이 뿌리내릴 곳은 어디일까.

하늘을 개척할 가지가 될지, 빛을 모으는 잎이 될지, 세상으로 퍼져갈 꽃이 될지 모른 채 봄을 기다리는 겨울눈02 신세는 이제 탈출하고 싶다. 고민으로 뭉친 어깨와, 뻐근한 목덜미, 찌릿한 꼬리뼈를 달래며 집으로 가는 길, 유독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사이에 피어난 작은 풀이 선명하게 보인다. 흙 한 줌을 집 삼아 잠깐 내린 비로 목 축이고, 욕심 없이 자란 풀. 내 영혼도 저 풀처럼 작은 자리에도 만족하고 피어나면 좋겠다. 상상 속에서 엄마가 속삭여준 말처럼 어떤 삶이든 그저 생생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여름 이불 같은 불안은 걷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카페 안을 돌아다니던 그 아이처럼.

곽다희

틈에서 자란 풀을 보면 카메라를 든다. 삭막한 도시에서 열심히 자기 존재를 피우는 사람들과 풀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독립 출판 환경 에세이 『구름의 말』을 썼고, 잡지 『함께 가는 예술인』에서 「토끼띠가 지구를 사랑하는 법」을 연재했다.

  • 01 대기·수질·폐기물·토양·해양 등의 오염 예방과 소음 및 진동공해 방지 등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학문적인 연구를 하는 분야이다.
  • 02 에수목이나 다년생 초본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겨울을 지내기 위해 만드는 눈으로, 봄에 새싹이 나올 수 있도록 겨울내내 보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