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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공간

클래식의 낭만,
에덴공원 강변밀크샵 그리고
솔바람음악당

김근자

사진제공 이준영

11월도 마지막 한 주간을 남긴 늦은 가을, 낙엽이 겹겹이 쌓인 에덴공원에 들어섰다.
숲길을 걷다 보니 전망대다. 나직한 주택가를 지나 부산 지하철 1호선 종점이었던 하단 가락타운이 있고 그 너머로 낙동강이 군데군데 보인다. 낙동강 너머로 가을 저녁 붉은 노을빛은 그대로이지만 그 많던 갈대들과 숲속 스피커에서 들려오던 클래식음악 소리는 세월에 자취를 감추었다. 강변밀크샵에서 솔바람음악당까지 에덴공원에 흐르던 선율은 어디로 갔을까.

에덴공원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6년 대청동 중앙교회 백준호 장로가 모친의 묘소 주변 3만여 평의 땅을 매입한 때 탄생했다. 백준호 장로는 그곳에 나무를 심고,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살던 낙원을 표방하며 ‘에덴원’으로 명명했다. 민둥산이었던 에덴원은 이제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오밀조밀한 숲길을 따라 돌아가면 낙동강이 한눈에 펼쳐지고, 에덴원부터 을숙도까지 이어지는 갈대밭과 철새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낙동강 하구의 황금빛 낙조를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부산의 사하구와 북구의 주민들에게 대표적인 유원지로 자리 잡으며 이름도 ‘에덴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봄가을 행락철이 되면 에덴공원을 찾는 시민들의 질서유지를 위해 경찰기동대를 고정 배치해야 할 정도로 붐볐다. 1970년대 에덴공원에는 둥글고 커다랗게 파인 구멍이 여러 군데 있었다. 같이 온 사람들의 숫자가 많으면 큰 구멍에서, 숫자가 작으면 작은 구멍에서 라디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놀았다고 한다. 한복이 외출복이었던 시절, 한복을 곱게 입고 발바닥이 뜨겁도록 흙먼지 날리며 춤을 추었던 그 시절 어머니들의 신명이 사랑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만큼 폭행, 살인, 자살 등의 사건사고 역시 끊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에덴공원은 그 이름에 걸맞게 붉은 노을이 비치는 저녁이면 김모 군, 이모 양 등 이름 모를 청춘의 아담과 이브들이 데이트를 하는 부산의 대표적인 ‘아베크족’의 성지로 더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01

에덴공원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백준호 장로의 둘째 아들인 백광덕 씨가 1963년 붉은 지붕과 굴뚝이 있는 ‘강변밀크샵’을 열면서부터이다. 화가 조수남이 간판을 만들고, 음악 감상을 위한 음향기기와 스피커를 설치하고, 살롱 음악을 위한 무대도 만들어졌다. 남포동이나 광복동까지 나가지 않고도 좋은 스피커로 클래식음악을 들을 수 있고, 연주할 수 있는 작은 공연장이 생긴 것이다. 시내 음악다방들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음악가 오태균, 안일웅, 화가 김종식, 송혜수, 신창호, 문인 김규태, 양왕용, 사진작가 허종배, 음악평론가 곽근수, 언론인 최화수 등이 모여들면서 강변밀크샵이 있던 에덴공원은 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클래식 마니아들과 부산시향 단원들이 찾아오면서 강변 음악회가 열렸고, 요산 김정한은 강변밀크샵에서 서여중 교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조각배를 타고 갈대밭으로 나가면 고니가 날고 강변의 주점 안에는 털게가 기어 다녔다.

사진제공 오성은

그런 강변 카페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바라보며 브람스, 드보르작, 그리그의 선율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유명했고, 부산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어 더 유명해졌다.

1970년대 에덴공원의 강변은 청년문화의 공간이기도 했다. 독재정권의 엄혹한 시대에 청춘들은 에덴공원 강변 카페와 주막을 찾았다.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미문화원에 방화를 시도했던 여학생들이 방화 후 도망친 곳도 에덴공원 주점이었다.02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갈대밭 너머 노을을 한 접시씩 공짜 안주로 주던 시절이었다. 부산대 학생들이 금정산성에서 술에 취할 때 동아대 학생들은 에덴공원 강변의 낭만 주점에서 취했다. 저렴한 가격의 주점들이 많아 대학생들이 몰리면서 대학생 문화에 동경을 품은 주변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교외 생활지도 단속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래여고 문예반 시화전, 전원문학동인회03의 시화전, 백일장, 사생대회, 피아노 트리오의 밤 등 문학 행사와 클래식음악 공연이 끊이지 않았다.

1976년에는 극단 ‘독립무대’(대표 설령)가 강변밀크샵을 개조하여 5평의 무대와 2백석의 객석을 갖추고 연극전용극장으로 탈바꿈하기도 하여 부산연극계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독립무대는 강변밀크샵에 조명시설, 소도구, 무대설비를 설치하고 레퍼토리시스템으로 극단 운영을 도모했다. 독립무대는 다른 극단에 연습장소나 공연무대를 무료로 내주거나 실내악단을 초청해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단원들은 공연이 없을 때 종업원으로 차를 나르기도 했다고 한다.04 에덴공원 강변밀크샵은 젊음과 예술에 한껏 열려있는 공간이었다.

1970년대 말이 되자 도시계획에 의해 에덴공원 인근에 도로가 생기면서 아름답던 갈대밭은 매축되어 주택단지가 되었다. 강변밀크샵까지도 도시계획에 편입되면서 백광덕 씨는 1986년 에덴공원 정상에 있던 매점을 철거하고 그 장소에 노천 음악당 ‘솔바람음악당’을 열었다.
음악으로 자연과 벗하며 낭만을 일깨우는 장소를 표명하며 천상병 시인이 부산을 방문한 그해, 솔바람음악당에서는 야외 <천상병 시화전>을 열기도 하였다. 솔바람음악당은 국악 연주단체 새여름국악실내악단의 공연, 오페라와 발레 공연 영상 상영, 부산시향 목관팀의 연습 장소였다.
특히 강변음악동호회가 결성되어 갈대가 아름다운 가을이 되면 강변음악동호회 가을음악회를 열었다. 2002년부터 매월 시민과 함께하는 정다운 음악회를 열어 금관5중주단 연주, 목관5중주단 연주, 현악4중주단, 성악곡 등의 연주를 선보였다. 솔바람음악당은 정기적으로 클래식음악회를 개최하면서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공간이었다.

솔바람음악당으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이 시절을 추억하듯 오태균 음악비가 낙동강 석양을 바라보며 서 있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지휘자이며, 후학 지도와 클래식음악 해설가로 부산음악사회에 헌신한 그의 공적을 기리는 음악비다. 평소 솔바람음악당에 자주 들렀던 오태균과의 인연으로 음악비 건립터를 내어주었고, 제자들과 후배들의 모금과 헌신에 힘입어 2001년 6월 30일 빗돌을 세웠다.
음악비 아랫쪽에는 오태균이 생전에 가장 많이 연주했던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첫 두 마디를 새겼다.

그러나 백광덕 씨가 암으로 투병하면서 모든 음악회가 멈추었다. 입원 중에도 그는 매일 아침 솔바람음악당에 클래식음악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자녀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솔바람음악당에 대한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솔바람음악당은 결국 2008년 문을 닫는다.
이후 보라색 등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2012년 4월 28일,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백성혜와 백성경이 솔바람음악당의 무성하던 잡초를 걷어내고 50년 전 에덴원을 처음 개척했을 때처럼 다시 음악회를 열었다.

부산시향 단원들이 참여한 <보리수>, <들장미> 등 독일민요를 4중주로 연주하였으며,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채수만의 대금 독주로 <젓대소리>가 연주되었다. 아마추어 오카리나 연주단 공연까지 더하며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연주회를 매달 한두 차례 개회하리라 계획하였다.

이제 에덴공원에는 강변밀크샵도 솔바람음악당도 없다. 시민들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갈대밭을 덮고, 강변밀크샵과 솔바람음악당을 철거하였다. 그리고 서부산권 관광 활성화를 위해 부산시 예산으로 에덴유원지를 조성하고 ‘솔바람문화센터’를 건립하여 카페와 갤러리로 운영할 것이라 한다.

우리는 에덴공원에서 바라본 노을의 서정과 낙동강 갈대의 기억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소멸을 향한 존재의 비가시성 속에서 에덴공원의 파편들을 어떻게 다시 이을 것인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갈대밭을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그리 다급하게 채우지 않았더라면, 털게가 클래식음악의 선율을 지고 나르고, 예산으로 결코 만들 수 없는 낙동강 갈대 너머 붉은 낙조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을.

사진제공 오성은

김근자

학창시절 장래희망이었던 초등학교 선생님을 열심히 하다가, 코로나 기간 인생이 짧고 덧없다는 것을 각성했다.
교직을 떠나, 대학원에 진학해서 나이 많은 학생으로 공부하며 사는 사람이다.

  • 01 「에덴공원에 핀 버들강아지」, 『부산일보』 1973.1.5. 1판 7면 기사. 에덴공원에 핀 버들강아지, 그 아래로 소한의 추위도 잊고 「아베크」가 한창이다.
  • 02 「불지른 후 퍼머머리컷」, 『부산일보』 1982.3.31. 3판 11면.
  • 03 1968년 결성된 문학회. 전국 규모의 문예콩쿠르에서 입상 경험이 있는 부산의 고교 3년생, 그리고 부산 각 고교 문예부의 핵심 멤버가 회원 요건이다. 문학회는 71년 문예무크지 『전원』을 창간했고 이후 『전원문집』, 『전원동문 문집』, 『문예부락』을 내기도 했다. 1976년에는 당시 부산지역 낭만주의자들의 거처였던 에덴공원 한 카페에서 10돌 기념 시화전을 열었다. 1980년대 들어와 부산 문단이 활성화되었지만, 1970년대까지는 부산에서 문화교류의 장으로 전원문학회 행사가 거의 유일했다고 한다. 전원문학회 회원으로 등단한 이들은 많다. 양은순, 조귀자, 최정심 시인이 1기이고, 이후로 백지영, 강태기, 김종완, 조영옥, 이성희, 이산하 등이 시와 동시 장르에서 이름을 잇고 있다.
  • 04 「‘독립무대’서 에덴공원에」, 『부산일보』 1976.1.22. 3판 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