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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고기 뿌리채소 조림이
익는 동안

라이스스튜디오(한수련, 오승훈)

나 못 참겠는데?
아니 좀만 더 기다려봐, 더 조려야 한다고

닭고기 뿌리채소 조림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했다. 이제 다 됐나? 싶을 때 한 번 더 참아내야 겨우 완성되는 법. 국물이 다 졸아들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데, 함께 일하는 오 씨는 참지 못하고 계속 보챈다.

무슨 점심 하나를 두 시간이나 하고 있어
어허, 그냥 점심이라니! 다 연구고 공부라고

맛있는 점심을 해주겠다며, 동시에 겨울 제철 음식 연구도 할 수 있다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닭고기와 뿌리채소를 준비해 점심 당번을 자처했건만,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완성을 못 한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미처 계산을 못 했다. 그래도 기왕 시작한 음식, 타협할 순 없다. 최고의 맛을 뽑아낼 때까지.

눈치 없는 우엉이며 연근, 당근이 물렁해질 생각을 안 한다. 역시 뿌리채소의 억센 성질, 쉽게 약해지지 않는구나. 땅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뿌리채소들은 겨울이 깊어질수록 땅 밑 더 깊게 뿌리내려 굳세게, 단단하게 익어감을 느낀다.

겨울이 되면 자연 만물은 밖으로 내뿜던 기운을 서서히 안으로 응축하기 시작한다. 땅으로, 굴로, 깊은 바다로 숨어들어 에너지를 모은다. 춥고 얼어붙고 거칠어지는 시간을 굳이 맞받지 않고 온화한 봄이 오기까지 기다리려는 자연의 지혜인 듯하다.

그래서 채소요리를 주로 하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그다지 반갑지 않을 수 있다.
만날 수 있는 제철 채소의 가짓수가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온갖 과실이 쏟아지는 가을의 식탁에 비하면 겨울의 식탁은 계절성이 희미해지고, 채소는 기운이 부족하고, 과일은 빛을 잃는다. 겨울이 오기 전 저장해놓았던 짠지며, 절임 같은 식재료들을 꺼내 한 상 차리는 게 그나마 겨울 제철 식탁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까.

겨울에는 거뭇하게 흙이 묻은 뿌리채소들을 주목해야 한다.
우엉, 연근, 토란, 당근, 이런 아이들이 땅에서 머금는 힘이 대단하다. 다만 뿌리채소들은 땅의 향이 진하게 배어있고 식감도 억세서 조화롭게 요리하기 쉽지 않다.

봄 식재료의 여리여리함이나 여름의 싱그러움, 가을의 풍성함은 그다지 조리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맛이 되는 것과 비교하면 겨울의 뿌리, 그 단단함은 요리에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이게 다 자연의 섭리 때문에 이렇게 됐다?
아니, 이렇게 유익한 이야기를 해 줘도...

날카로운 오 씨에게 어줍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국물이 다 졸아들기까지 아직 시간이 더 남은 것 같은데 초조해진다. 땅의 에너지가 쉽게 꺾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구차한 변명을 해 가며 얼른 조림 국물이 줄어들기를 빌어본다.

공연히 익지 않는 조림을 주걱으로 빙빙 뒤적거리다 문득, 모든 존재들은 억세지고 버티는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꼭 한 번은 밖으로 뻗어나가기를 멈추고 안에서 깊이를 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 같다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여름처럼 뻗어나가던 한때, 왕성하게 사람들을 만나며 사회생활을 하고, 일을 벌이고 수습하고, 치열하게 돈 벌고 해외여행을 떠나고, 그렇게 화려하고 번잡한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디어는 고갈되고, 관계에 치이고, 자신을 갉아먹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습에 온통 신경을 쏟았다는 느낌에 빠져들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쉬기는커녕 더 강한 도파민, 더 큰 자극으로 그 빈 곳을 메우려 더 열심히 활동했다. 채워질 듯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고 끝없이 달렸으며 그 결과 내 삶은 조금 설익은 듯 간이 어긋난 듯 풍미를 잃었었다.
혹시 그때 잠시 멈춰서서 깊이를 채우는 시간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내 안에 집중하고 뿌리를 키울 수 있었다면 조금은 덜 흔들리고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었을까.

우엉이 하나도 안 쓰고 향긋함만 남았네?
그치. 닭고기에도 은은하게 향이 배었고.

겨우 완성된 닭고기 뿌리채소 조림. 곰처럼 큰 오 씨가 어울리지 않게 뿌리채소 하나하나 섬세하게 맛을 느끼며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맥이 풀린다.
뿌리채소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키우는 시간을 보냈고, 자기 안에 응축시킨 에너지를 밖으로 풀어낸 결과..
오 씨의 영양분이 되었다. 안정적인 자연 순환의 과정을 목도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 겨울에는 벌여놓은 바쁜 일들 몇 가지만 마무리되면 꼭 내실을 다지는 시간을 보내보자고 다짐한다. 무엇이 내실일까, 조용히 공부도 하고 체력도 기르고 교양도 쌓고, 아니 외국어를 배워야 하나, 그러면 되지 않을까. 새롭게 맞이할 봄부터 또 열심히 뻗어나가기 위해, 이번 겨울은 내 안으로 깊게 들어가 뿌리를 통통하게 만들어 보기로 한다.

이 다짐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새로운 일을 더 벌여서는 안 된다. 벌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눈앞에 새로운 일이 나타날 때 흥분을 가라앉히기란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일이다.

간단 닭고기 뿌리채소 조림 레시피

  1. 우엉, 연근, 당근은 껍질을 벗기고 한입 크기로 굵게 썬다. 표고버섯은 밑동을 제거하고 4등분, 대파는 푸른 부분을 굵직하게 썬다. 닭고기도 한 줌 크기로 먹기 좋게 썬다.
  2. 기름을 두르고 닭고기 표면이 하얗게 될 때까지 볶다가 닭고기는 일단 꺼내고 닭고기에서 나온 기름을 이용해 다른 재료들을 볶아낸다.
  3. 조림국물(물, 간장, 맛술, 설탕의 배합)을 넣고 조리다가 절반으로 줄면 대파는 꺼내고 닭고기를 넣어 함께 조린다. 조림국물이 거의 사라질 때 완성.

라이스스튜디오(한수련, 오승훈)

부산 영도에서 요리도 하고 채취도 하고 수영도 하며, 음식이 가져다주는 감각과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 빚어내기 위해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