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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無言)의 공간,
예술로 다가오다

글·사진신나리

2020년 11월, 코로나19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지역문화예술교육기반구축 사업 <빈방의 서사(敍事), 다섯 가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21일 동안 부산의 공·폐가를 비롯한 다양한 공간이 지닌 고유한 이야기에 다섯 작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서사를 창조했다.

이 글은 당시 사업 담당자로서 보도된 프로그램의 내용 외에도, 다섯 공간에서 직접 경험한 이야기들을 나누고자 한다.

장림시장에서 발견한 예술의 힘

김보경 작가는 1970년대 대티터널 공사로 인한 강제 이주 정책으로 형성된 사하구 장림동의 장림시장에서 폐업한 식당을 체험 공간으로 삼았다. 2년 전 화재로 폐쇄된 이 공간은 쓰레기와 먼지로 가득했지만, 작가는 그곳을 “예술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일상 속에서 창조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장소로 탈바꿈시켰다. 장림동 주민들과 시장 상인들이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던 날, 한 할머니께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랑하며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이 한 사람의 삶에서 특별한 경험으로 꽃 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래시계가 내게 주는 치유

김덕희 작가는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 끝자락의 빈집을 작업 공간으로 선택했다. 그 집 옆에는 시멘트 담장을 사이에 두고 큰 목재공장이 우뚝 서 있고, 멀리 보이는 작은 바위섬 위엔 낚시하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평화로운 풍경에 여유로운 느낌을 더해주었다. 작가는 집 안을 모래로 가득히 채웠고, 발을 디딜 때마다 마치 부드러운 눈을 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요한 모래 방 안에서 지나온 시간 중 기억하고, 기록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모래시계로 만들었다. 아직도 그 모래시계를 볼 때면, 그때의 나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며, 소중했던 순간들이 영원히 간직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집

여상희 작가는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의 제일 꼭대기에 위치한 빈집을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집은 2년 전 돌아가신 집주인의 오래된 찬장, 소파, TV, 그릇 등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시간이 멈춘 공간이었다. 작가는 아미동에서 자생하는 식물과 기존의 비석 작품을 결합해, 시간이 흐르며 인간의 자취가 자연에 의해 서서히 덮여가는 과정을 담아냈다. 여기서 ‘비석’은 대중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을 뭉쳐 만든 작품으로, 작가가 선택한 시간과 기억의 매체이다. 아미맘스 회장님의 안내로 진행된 마을 투어는 마치 작가의 작업을 확장하여 직접 체험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아미동은 오랜 세월 동안 자연과 인간의 흔적이 얽히고 쌓여, 그 자체가 살아있는 예술과 역사적 공간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엄마라는 이름 속 또 다른 나

왕덕경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누군가가 실제로 거주하는 부산진구 초읍동 원당골의 한 주택 옥상을 새로운 전시 체험의 장으로 삼았다. 이 옥상은 화분과 텃밭, 손자와 손녀들의 장난감, 길게 드리운 빨랫줄이 어우러져 평범한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이 깃든 공간이었다. 작가는 ‘엄마 시기’를 공간화하기 위해 두 개의 임시 건물을 옥상에 설치했다. 11명의 작가와 일반인들이 제작한 ‘엄마’와 관련된 작품들을 감상하며,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졌던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마주한 감정을 단어와 문장으로 유리잔에 새겼다. 비록 나는 아직 ‘엄마 시기’를 겪어보진 않았지만 ‘엄마’라는 그 이름 속에 담긴 사랑과 책임, 그리고 자기희생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시간의 흔적, 소리 산책

정만영 작가는 부산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1960년대에 지어진 2층 양옥을 전시 공간으로 소개했다. 이 집은 대부분의 내장재가 사라지고 콘크리트 구조만 남은 채, 고층 아파트와 재건축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은 여전히 당시 가족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두 개의 아궁이와 지하의 족욕탕, 맷돌은 마치 시간의 조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작가는 ‘촉각적 소리 산책’을 통해 시각적 경험을 넘어,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소리와 공간의 관계를 깊이 탐구할 기회를 제공했다. 올해 부산비엔날레의 전시 공간으로 사용된 이 집은 ‘초량재’라는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변모했다. 이 공간이 품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새로운 문화적 생명력을 얻어 더 많은 사람과 공유되기를 기대한다.

비대면 상황 속에서 진행된 1인 맞춤형 문화예술교육 <빈방의 서사(敍事), 다섯 가지 이야기>는 작가들이 선택한 각기 다른 공간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나를 포함한 186명의 참가자에게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과 경험을 안겨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함께해 주신 다섯 분의 작가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서는 부산문화재단 컬쳐튜브를 통해 <빈방의 서사(敍事), 다섯 가지 이야기> 영상을 꼭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
끝으로, 4년 3개월 동안 함께한 부산문화재단 식구들에게 변함없는 응원의 마음을 전하며, 모두의 일상이 예술로 가득한 행복한 날들로 채워지길.

신나리

자기소개가 제일 어려운 INTJ입니다. 언젠가는 제대로, 멋지게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