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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ㅅㅁㅎㅈㄷ의 비밀

글·사진박소라

세상에는 두 부류의 직장인이 있다. 회사의 비밀을 아는 직장인과 모르는 직장인. 나는 그 비밀을 아는 직장인이다.

처음 그 존재와 마주친 건 며칠 전이었다. 야근 중 잠깐 눈을 붙였다가 어렴풋이 인기척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옷을 덮어주려 하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던 옷은 고운 광택이 흐르는 새빨간 비단에 정교한 용 문양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는... 틀림없는 곤룡포였다.
흐트러짐 없는 눈빛, 고요한 표정, 하지만 그 속에 깊이 서린 강렬한 기운. 평온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 나는 첫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세종...대왕...?”
“내가 단잠을 깨워버렸구나. 집현전에서 책을 읽다 잠든 신숙주가 떠올라 옷만 덮어주려 했네.”
“대왕님이... 어떻게 여기...?”

대왕님은 창밖을 가리켰다. 나는 그 손끝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 동상! 세종대왕 동상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회사 건물 앞에 늘 있던 그 동상이.
우리 회사는 폐교를 리모델링한 곳이다. 옛 학교의 모습을 그대로 살린 건물 앞, 운동장이었던 자리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항상 있었는데, 그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세종대왕이 전해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어렸을 때 학교마다 그런 괴담 있지 않은가. 매일 밤 운동장의 세종대왕 동상에 있는 책이 한 페이지씩 넘어가는데 페이지가 다 넘어가는 날 학교 건물이 무너진다든가 하는 그런 괴담들. 그런데 괴담인줄만 알았던 이 이야기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했다. 페이지는 1월 1일 밤에 넘어가는데 모든 페이지가 넘어가면 동상이 있는 장소 중 한 곳을 선택해 세종대왕의 영혼이 찾아갈 수 있고 영혼이 깃든 동상은 그날부터 매일 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종대왕이 선택한 장소가 바로 내가 다니는 회사 부산문화재단이었다.

“왜 이곳으로 오셨어요? 동상은 광화문에도 있고 다른 좋은 곳들이 더 많을 텐데요.”

세종대왕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물론 머물 곳은 많았다. 하지만 이곳이 내게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더구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세종대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전 부산은 여러 차례 외적의 침입을 견뎌내야 했던 곳이었지. 그때마다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땅이다. 시간이 흘러 그곳에서 백성을 위해 문화와 예술을 전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여기이니 자연히 마음이 이곳에 닿았다. 부산문화재단의 로고를 ㅂㅅㅁㅎㅈㄷ이라는 자음으로 만든 것도 기특하더구나. 몇 년 전 세종문화상을 수상했다는 점도 내 관심을 끌었지. 여전히 이 땅에는 인재가 가득하구나.”
“그러셨군요. 평소에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으신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밤마다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무슨 일을 하시나요?”
“내 원래 궁에서도 늘 여러 서적과 기기들을 탐구하며 밤을 지새웠었지. 여기서도 마찬가지네. 밤마다 문서와 기기들을 탐구하고 직원들이 어려워하는 업무에는 해법을 메모로 남기기도 한다네. 요즘에는 기타라는 서양 악기를 탐구 중일세.”
“대왕님께서 기타를요?”
“내 종묘제례악도 작곡하지 않았던가. 서양 악기를 익히는 것도 흥미롭더구나. 기타란 악기의 소리가 아주 탁월하더군. 손끝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열심히 한다네.”

세종대왕은 눈을 감으며 부산의 문화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셨다.

“낮 동안 직원들이 문화예술 사업을 논의하는 걸 들으면 나도 문화예술을 위해 고민했던 시절이 떠오르더군. 황희 정승이 고생이 많았지. 그 못지않게 문화재단의 직원들도 밤낮없이 노고가 많더군. 자네는 어떤 업무를 맡고 있나.”
“저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를 펼친 조선통신사의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문화교류는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간의 정서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실로 자랑스러운 일일세. 요즘은 ‘아파트’라는 노래가 세계적으로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 있다 들었다. 내 한 번 들어보니 베이스 음이 매력적인 노래더구나.”

요즘 유행하는 음악까지 꿰차고 계시다니 ‘정말 대왕님은 대왕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왕님을 이리 만나 뵙다니 영광스럽고 믿기지 않습니다.”
“이제 익숙해지면 자네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지겠지. 자네가 하는 일이 흥미롭구나. 내 조선통신사의 정신을 잘 알고 있네. 자네도 그 일을 통해 얻는 것이 많을 것이야. 사람과 문화가 교류하는 일이란 단순히 사신의 왕래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니 말일세.”
“네. 어려운 순간도, 뿌듯한 순간도 많았지요.”

그날 밤 세종대왕과 나는 한참을 더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 후로 다시 대왕님을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출근길마다 세종대왕 동상의 손끝을 유심히 바라본다.
점점 두꺼워지는 굳은살처럼 부산의 문화예술이 더 깊어질 것이라 믿으며.

박소라

부산문화재단 문화유산팀에서 근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