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성
영화를 보다 보면 말입니다 인간이란 종자는 참 솔직하지를 못해요 미생물처럼 단순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해 아래에는 새로움이 없다고요? 그 대사야말로 육천 년 묵은 가스라이팅 아닌가 싶지만요 희로애락은 등장인물 중에서 재등장해야 한다는 이야기의 법칙은 그 누구도 어쩌지를 못하겠죠 세상을 냉소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것 빼고 전부 달라졌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젠 진짜 볼만한 게 없어요 본 걸 또 보고 또 보다 보니… 환멸에 비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네요 클리셰적인 느낌? 느낌적인 컬트? 컬트적인 클리셰? 예컨대 영화관을 찍는 영화관을 찍는 영화가 상영될 때 관객들의 무표정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무표정을 바라보는 사물의 무표정들 검은 화면은 어디에나 있어요 감독의 시대착오적 취향을 불평하던가 평론가의 정치적 성향을 불매하세요 편집점을 벗어난 뒷담화는 상업성이 부족하군요 불이 켜지면 관객은 감독으로 감독은 관객으로 자리를 바꿔주시겠어요? 여기도 짬뽕이고 저기도 패러디니까 심미안을 영화롭게 하려 무엇을 더 사랑하고 미워할 수나 있겠어요? 그건 그렇고 없는 연애를 그리워하며 고전 영화를 다시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오마주된 거장의 상징들은 하나같이 아득해요 반전이 없는 게 반전이라 아날로그 필름은 보기 좋게도 녹이 슬었네요 오늘은 내심 바라던 최후의 날이므로 크레딧은 끝내 올라오지 않을 겁니다 픽션은 아름다운 엔딩에 목매고 다큐멘터리는 추악한 오프닝에 목이 메죠 피로 시작하는 시퀀스엔 회한이 없고 눈물로 끝나는 푸티지엔 신비가 없겠죠 인공위성으로부터 동시 상영되는 영화에는 실시간이 실시간으로 등장하는군요 상영 금지된 아우라가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카타르시스를 치사량까지 느끼셨나요? 곧 죽어도 지켜야 할 톤 앤 매너 세상이 전지적으로 되감기 될 테니 주위의 자유전자들을 꽉 붙잡으십시오
윤보성
199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17년 시인수첩을 통해 등단, 2022년 시집 『망현실주의 선언』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