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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힙’으로서
트랜스로컬

김만석

트랜스로컬은 일종의 접촉지대다.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치며 영향을 주고받는 각축장, 때로 이 과정에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무언가가 창출되기도 한다. 마치 근대화를 지나며 명태와 명란이 보여준 변화상처럼 말이다. 공간의 한계를 넘어 다양한 개념을 수렴, 융합해 진정한 ‘힙’을 실현해온 부산의 트랜스로컬을 살펴본다.

부산에 관한 외국어 표기는 여러 차례 변경되어왔다.
Fusan에서 Pusan으로 그리고 지금은 Busan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비행 경험이 있다면 종종 Pusan이 아직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도 P로 시작해 B로 정착한 바 있다. 표기의 변화가 단순히 ‘표현’의 차이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라면, F—P—B로의 변경을 그저 이행해왔다가 아니라, 각각의 부산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F의 부산이 있고 P의 부산이 있으며 그리고 B의 부산이 있는 셈이다.
이 부산들은 일정한 간극이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뒤섞이고 엮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F의 부산에서 이루어진 음식의 교차는 서로 다른 방식 아래에서 ‘발명’되어 온 사례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테면 명태와 명란의 경우에는 ‘대구(大口)문화권’에 사실상 속해있었던 일본에 의해 재발명된 이후 일본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안에서 밖으로 확산된 음식의 유형에 해당된다. 이와 달리 커피의 경우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 한반도 사람들에 의해 재발명되어 향유된 것이다. 명태와 명란이 오랜 시간을 거쳐 일본어와 러시아어, 중국어로 번역되었다면, 커피는 가베, 가배, 가페차, 양탕국 등 다양한 번역어로 명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연원한 음식과 서구와 일본에서 유입되어온 음식은 일방적으로 ‘이식’되거나 ‘전파’된 것이 아니라 상호 ‘번역적 실천’으로 착근한 것에 가깝다. 음식과 식재료에 대한 이런 접근은 ‘원본’이나 ‘기원’의 문제보다 그것이 어떤 영향 아래에서 지역과 지역 사이를 ‘운동’/‘변이’했는가 혹은 하는가에 더 집중하도록 만든다. 음식이나 식재료가 ‘정태적’인 것일 수 없다면 ‘접촉’의 과정에서 활성화되는 양상들을 살피는 편이 훨씬 풍부한 이야기를 건네주기 때문이다. 가령, 아래의 이야기는 로컬이 품고 있는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실례에 해당된다

북조선화폐를 남조선에 유입시켜 남조선 경제를 교란시키는 악질선원 及(급)이 사실을 탐지함을 기화로 그 선원에 협박하야 삼십여만원을 강탈 착복한 모청년단원이 드디어 거 팔일 경 부산역서에 일망타진되였다.
즉 본적 제주도 대정면 가파리 238 주소 부내(府內) 대교로 5가 156 선주 □□□(41) 본적 전남 무안군 □산면 우이도리 주소 부내 대교로 5가 156 선원 □□□(35) 본적 경주군 외동지면 □리 주소 아미동 2가 86 기관장 □□□(27)은 2월 10일경 공모하야 생고무 1□ 중유 30도람 「마신油(유)」 8도람 소주 2錫(석) □□ 99포 등 싯가 300만원을 富榮丸(부영환)에 적재하야 남항 해안에서 출항하야 북조선 함남 신포항에 밀착하야 현금 149만원 干明太(간명태) 29짝 명란 42樽(준)과 교환하야 3월 20일에 부산항에 도착하야 明太樽(명태준)을 밀매하는 것을 탐지한 주소 영선동 3가 632 모청년단 목도분단 검찰대장 □□□(24) 외 1명은 이 사실을 탐지□□ 기화로 부영환 선주 □에게 경찰에 밀고한다고 협박하야 30여만 원을 강탈 착복하야 소비 중을 부산서원에 탐지되여 일미 4명이 거 팔일부터 일망타진되였다 한다.

- 『밀수물자를 협박 강탈』, ≪부산일보≫ 1948. 4. 14.

이 기사는 정부 수립이 임박한 1948년 4월의 정세 속에서 영도에 거주하는 세 명의 밀수업자와 한 명의 청년단원 그리고 부산경찰서의 경찰이 물고 물리는 드라마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 명의 밀수업자들은 함경남도 신포항에서 부산항으로 간명태와 명란을 가져오기 위해 생고무, 머신유(machine油), 소주 등을 가지고 가 교환한 것으로 나타난다.

비대칭적으로 보이는 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원인은 남북한이 현실적으로 분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명태와 명란은 함경남도 항포구(특히 원산만 일대)에서 난 것을 제일로 쳤다. 즉, 품질이 월등한 명태와 명란을 ‘밀수’하면 한 몫 챙길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진행한 것이겠지만, 그러므로 함경남도산 명태와 명란에 대한 수요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이야기는 실패한 밀수담을 초과한다.

부산항과 신포항 사이에서 일어난 밀수 혹은 밀무역은 냉전 체제라는 강력한 교류금지의 장막에도 불구하고 남북 사이에 비가시화되어 있었던 일종의 ‘교류’의 한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패했으나, 다른 밀수꾼들은 성공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까 말이다(밀수는 ‘검거’되어야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본적지가 모두 다른 이 세 명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가 무더운 더위를 무릅쓰고 우리집에 보내 준 명란은 원산에 있는 H수산회사의 대냉동창고 처음으로 냉장 시험차 전해 12월에 집어 넣어 두었던 것인데 너무도 풍미가 좋아 회사 안에서만 먹을 수가 없어 한통을 보내준 그야말로 여름 더운 때에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 사실 그 뒤 몇 해를 두고 여름만 오면 그처럼 냉장하였던 명란젓을 찾아 보았으나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부산 피난 당시에도 찾아 보았으나 구하지를 못하여 단념하고 말았는데 꼭 한번 만이라도 좋으니 무더운 여름날에 그것으로서 식히 맥주를 맛보는 기회가 와 주었으면 좋겠다.
[단기]4290[1957년]”

- 윤고종, 『명란젓』, 『쑥꽃 사어록』, 범조사, 1959. 221~222쪽. []은 인용자

한편 윤고종이 이 글을 썼을 때는 부산 영도에 있던 피난민이 대거 속초로 이주를 했을 무렵이다. 실제로 속초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 중인 자료 가운데 영도 풍경과 국제시장 대화재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이 시기의 부산에 관련된 서사와 이미지는 부산 내부에만 있는 것일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영도 피난민들이 속초로 대거 이주하게 되면서,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중단되어 있던 명태잡이가 속초에서 다시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해방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십여년의 기간 동안 후쿠오카에서는 부산의 ‘맛’으로 기억하고 있던 명란젓을 카와하라 도시오가 ‘카라시멘타이코’로 재발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일국교가 다시 이루어지는 1965년 전후로 속초 등지에서는 일본식 제법으로 변형된 명란젓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일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며 중앙수산검사소(영도)에서는 일본 홋카이도의 수산검사소의 제조법을 검사의 기준으로 삼게 된다.

요컨대, 부산(F, P, B)에서의 식재료의 이동과 변형의 과정은 갈등적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자 로컬의 형질변화에 맞물려 있음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달리 말해, 일본인, 피난민, 향도이촌 혹은 도시유이민의 급증으로 폭발적으로 확대된 부산의 내력과 이력은 고정된 정체성으로 ‘부산’을 규정하기보다 항상 새로운 역사적 조건과 부대낌으로써 부산‘들’을 재구성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은 여러 역사적 장소와 경험을 혼종적으로 담아내는 것이면서 다른 로컬의 역사와 경험에 접속하고 연결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직 하나의 발전 회로만을 지고의 선으로 강제하는 지배적 논리가 차이를 차별로 위계화하는 과정이라면, 그 속에서 다종다양한 삶이 공존하는 ‘힙’이 나타날 도리가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산들을 꾸려온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역사적 지층이 부산들의 미래를 안내해주리라

김만석

2005년 조선일보 미술비평으로 등단했고 2018년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반년간지 <문학/사상>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역사적 해양문화론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