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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내고 싶은 작곡가

이승은

想 생각할 상 時 때 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지새운 긴 고뇌의 시간, 많은 생각 끝에 뒤늦게 완성된 예술가의 생각과 시간을 지원합니다.

2023년 하반기에 신설된 <상시> 지원사업의 공고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문구이다.
또한, 다양한 예술적 실험, 시의성을 띠거나 창의적인 기획을 지원한다고 명시되어 있어 평소에 사회적 갈등을 음악적 언어로 풀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데다 팬데믹 이후 예술계에서 더 가속화된 장르 융합의 경향 속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도전 의식도 들었던 만큼 쉽게 지원서를 쓸 수 있었다.

[개인과 사회의 교차점에서 작곡가, 소리 내다]라는 사업명은 작품의 주제나 배경은 작곡가의 사적인 경험에 기인하지만, 우리가 모두 겪을 수 있는 보편적 사회 문제에 기반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작곡가는 부조리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기꺼이 소리를 낸다는, 삶이 예술이 되고 싶은 작곡가의 의지를 담은 제목이다.

(필자는 자주 접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낯섦으로 분석하지만) 난해성으로 인한 현대음악과 청중과의 소통 부재에 대한 해결책으로 상당수의 작곡가가 옛음악 어법을 택한다. 하지만, 관습을 답습하는 예술에 비판적인 필자는 상세한 곡해설 등으로 청중에게 작업 방식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식으로 소통을 꾀하는 편이다. 이번 사업에서는 개별 작품마다 직관적인 제목을 붙여 청중이 작품을 접하기 전에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해당 작품의 주제 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해 악곡의 진행이나 형식, 연주법 등을 명확하게 하였다.
총 다섯 개의 개별 작품을 주제 면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곡마다 개연성을 높이고 관객의 몰입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고자 하였다.

악기 소리가 관객석 뒤쪽에서 나는 바람에 처음 여러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작품, <나답게 사는 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을 세상에서>는 차별금지법 법안 내용을 오역 및 선전하는 일부 한국 기독교회에 대한 비판 의식과 성 정체성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주제 의식을 담은 작품이다. 두 명의 연주자가 관객석의 모퉁이에서 시작하여 객석 여기저기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연주한다. 소리 재료로 ‘만인 선언문(2021.04)’을 프레이즈 사이나 끝부분마다 짧은 음가로 한 음절 또는 두세 음절씩 넣었는데, 그 메시지가 궁금해서 집중하여 단어와 문구를 조합하면서 감상했다는, 작곡가가 미처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 많아서 흥미로웠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영상전문가 및 무용수와 협업한 작품으로 최석균 시인의 <빛나는 걸음>이라는 시에서 ‘개벽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새벽으로 간 걸음이 있다’는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최소한의 모티브 반복으로 지난한 여정을 시각·청각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음악은 하나의 리듬 패턴(장단)을 사용하였고 무용수도 같은 동작을(리버스 포함) 반복하며 양초가 꺼지지 않게 조심히 옮기는 행동의 반복으로 편집된 영상물이 동시 재생된다. 재료적 단조로움을 깨트리기 위해 두 가지의 이질적인 요소(가야금과 전자음원, 한국 무용수와 서양 영화의 한 장면)를 사용하였다. 다수의 관객이 영상의 마지막 장면(마침내 양초 불이 꺼지지 않고 성공적으로 옮겨지는 장면)과 마지막 작품(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에서 언급되었던 ‘완전히 깨뜨리지는 못해도 작은 균열을 만들어 냈다’라는 문구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을 보고 의도대로 전달된 점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였다.

<침묵은 동조다>는 수어 통역사의 조언을 받아 수어에서 따온 모티브를 음악과 영상 및 무용에 일부분 적용한 작품이다. 처음 써보는 일렉기타의 편성과 무용수의 자의적 해석으로 순탄한 작업은 아니었지만, 일렉기타의 소리만큼 강렬한 비주얼과 무용수의 서사적 해석으로 관객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 작품이다. 당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지하철 시위를 뉴스로 접하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적극적으로 연대하지 못한 작곡가의 자기반성이자 부끄러운 고백으로 시작한 작업이다. 공연에 참석했던 수어 통역사의 감상평이 계기가 되어 현재 농(아)인을 위한 음악 작품과 배리어프리공연에 대해 더 깊이 있게 구상하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렸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대담 형식으로 대본(text)이 지배적으로 사용되어 프로그램 중 가장 구체성이 강한 작품이다. 작년 여름에 발생했던 서이초 교사의 사회적 타살 사건을 다루면서 가정 양육 방식과 초등교육 현장 문제점을 대학교와 시간강사 처우 문제로 연결하였다. 작곡가이자 현 대학 강사인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2010년 고려대생 자퇴 선언문, 2012년 무상보육 실시, 2019년 강사법 제정, 2023년 글로컬 대학·지방대 통폐합 등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연주 시간이 거의 30분에 이르는 긴 작품임에도 관객의 몰입도와 호응이 컸던 작품이다. 특히, 관객 중 교육대학원생들이 많아서였는지 작품의 화자가 대학생인 줄로 예상했다가 대학 강사임을 알게 되어 놀라웠다는 의견과 미래의 교사가 될 이들의 많은 공감과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상시> 사업의 완료 시기가 그 해 말까지였던 까닭에 선정된 날부터 공연날까지 거의 4개월 동안 평균 수면 시간이 4시간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가혹한 나날을 보냈던 터라 지금도 번아웃 증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지만, 원고 청탁을 받은 후 작업일지와 학생들이 썼던 감상문을 읽으면서 이 공연에 대해 다시 한번 반추하게 되어 뜻깊고 감사하다. 유독 힘들었던 작업 기간 동안 겪었던 처절한 고독감과 연약함으로 신 앞에서 한없이 작은 피조물일 뿐임을 고백하면서 예술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더 단단해지는 과정이 되길 기도한다.

2차 면접 심사 때의 일화이다. 발표 시간 중 필자가 가장 힘줘서 했던 발언에 심사위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보시는 예산서는 작곡가의 혹독한 자기검열을 거친 결과물입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한 가벼운 농으로 여겨졌을 이 발언은 필자에게는 꽤 진지한 문제이다. 작곡료를 책정할 수도 없었던 옛 시절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작곡은 현실적인 노동이 아닌, 마땅히 감내하고 초월해야 할 행위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심지어 작곡 협회에서도) 팽배하다. 작곡가가 노동에 대한 자기검열을 하게 된 데에는 사회의식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재단과 심사위원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재단 측에게 음악 분야 중 창작 단체에 대한 꾸준한 의식 변화 노력과 더 많은 <상시> 지원사업을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

이승은

곡 쓸 시간 없는 작곡가이자 교육 아닌 감정 노동하는 대학 강사.
STUDIO FRISCHE KLÄNGE(슈투디오프리쉐클랭에: 신선한 소리 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