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오성은
인류의 조상이 직립을 선택하면서부터 힙(hip)은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양손의 자유는 그만큼 요통과 바꿀만한 중대한 결정이었다. 이족보행으로 골반이 좁아진 인류는 뇌가 다 자라지 못한 말랑말랑한 태아를 낳아야만 했고, 이는 수렵채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진화였다. 점차 농경 사회로 삶의 양식이 전환됨에 따라 주거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으며, 선 채로, 전보다 더 많은 노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디스크 탈출증이나 관절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치질 같은 탈장 역시 심각한 질병으로 출현했다. 심장과 동일선상에서 권위를 지켜오던 항문을 직립에 의해 신체 중 가장 아래에 위치한 내장기관으로 자리매김하며 혈류의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러나 곰곰 살펴보자면, 우리 조상의 힙은 사족보행이었을 때부터 그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다만 더 높은 곳을 향해 머리를 치키고자 하는 상승의 욕망이 직립을 선택하도록 부추긴 것은 아닐까. 머리가 높아지면 당연하게도 시선이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게 된다. 그러한 욕망이 사피엔스를 사람속(homo) 유일한 종01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드높아지려는 인류는 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착취와 전쟁과 학살과 마천루 건설과 달 탐험 경쟁을 통해 현재에 도착해 있다. 내게 상류층 만이 누릴수 있는 호화로운 달나라 탐사 티켓이 주어진다면, 나는 유유히 그 티켓을 타인에게 건넬 수 있을까. 한 점으로 수렴되는 이 고도(高度)를 가진 것들의 위용으로 내 목은 어제보다 더 굽어지는 기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어쩌면 바로 저 티켓을 갈구하며 여태껏 굽어 살아왔다. 욕망을 향한 일차함수의 기울기만큼이나 나의 목과 허리와 마음이 굽어지고 있다. 나는 꼬리뼈의 통증으로 찾아간 동네 한의원에서 피를 뽑고, 약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하는 동안 무책임하게도 최초의 직립 인간을 탓하는 중이다. 내 안에는 직립의 유전자가, 힙보다 눈이 높은 유전자가 꿈틀대고 있다. 뜸치료를 하느라 힙이 뜨거워진다. 그래도 붉어지는 건 늘 두 뺨이다.
기실 우리가 이 봄의 테마로 삼은 힙(hip)은 허리께의 둔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에 출현한 힙스터의 용례에서 그 희미한 정의02를 찾아 내는 게 타당하다. 1940년대의 흑인 문화에 등장한 힙스터는 21세기에 들어와 주류 자본 문화에 저항하는 하위문화라는 의미와 그마저도 중산층의 소비문화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03 나는 단 한번도 힙스터인 적이 없었지만(힙스터의 전제 조건 1. 자신이 힙스터임을 부정해야 한다) 힙에 대해 떠올리는 동안 견디기 힘든 요통을 앓았다. 이 같은 우연을 필연적인 합리화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다.04 나는 소설가로 살아가는 일이 그 자체로 신선한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고, 요통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육체노동이라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의 시선은(앞 문단에서 기술했다시피) 욕망이 (들끓고)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고 있다. 내게는 사실 최신의 경향(hip)에 대한 동경은 없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감각에의 성찰이, 아니 성찰을 욕망하는 어떠한 감각이 낯선 마찰을 빚고 있고, 나는 그걸 힙이라 부르고 싶다. 실상 힙은 직립 뒤에 숨은 위대한 신체 부위도, 주류에 대한 저항 의식의 또 다른 이름도, 히피(hippie)나 힙합(hiphop)에 대한 어원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음성적 기호도, 중산층의 놀이도구로 전락한 모순을 가진 딜레마도 아니다. 그저 힙은 우리가 굴려내는 혀끝에서 공명한 일종의 소통이다. 힙. 나는 그것이 나의 단어라고는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관통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의 흥미를 느낀다. 우리는 모두 저 단어를 통과하여 작품 한 점과 마주하게 되었다.
임희정의 <걸어간다>는 걸어갔다와 걸어갈 것이다 사이에 있는 현현(epiphany)이다. 무엇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대상의 출현이 이 봄에 있어 반갑고 고맙다. 돌이켜 보면, 처음 그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내 마음이 기운 까닭은 돌출하는 색감과 구조적 유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할머니 때문인 것 같다. 내 할머니의 허리굽음과 할머니와 나의 추억 굽음과 내 할머니의 주름 굽음과 내 어머니가 당신의 어머니를 떠올릴 때의 미소굽음과 할머니 집 앞 돌담길의 굽음과 떠나기 전 마지막 모습, 그러나 작품 속 그리 굽어 있지 않은 인물들에게서 찾아낸 굽음과 굽음 없음의 마찰이 평면도가 아닌 입체로 살아와 당혹을 전해주었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꼿꼿한 직립으로, 상하좌우로 이동하면서 동시에 캔버스 밖으로 튀어 나가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는 것만 같다. 아니, 이미 바깥의 일상적 풍경이 그림 안으로 들어갔으니 되돌아 나온다고 해야 할까. 나는 거기에서 어떤 욕망이나 욕망의 시선이나 진화적 욕망이나 욕망의 진화를 엿볼 수가 없다. 오직 거기에는 소실되었거나, 소실되지 않은 어떤 상흔이 해맑게 새겨져 있을 뿐이다. 벚꽃보다 좋은 그림이다. 흐트러지면서도 투명하게도 걸어가는 작은 공명을 오늘의 힙으로 명명하여, 이젠 만날 수 없는 나의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다.
할머니여. 아, 이 힙한 인류여.
오성은
소설가. 『라스팔마스는 없다』, 『되겠다는 마음』 등을 썼다. OHSEONGE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