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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

더위 다음 추위

김지훈

장소
광장 속 벤치 하나, 가로등 하나, 계절을 알 수 없는 나무들

등장인물
해일
요원

외투를 걸친 해일이 애처롭게 서 있다. 그의 입김이 무대의 공간을 채운다. 손과 몸을 비비며 체온을 높이려는 그의 몸짓이 애잔하다. 그는 언 입을 녹이기 위해 입을 비비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해일: 너무 춥다. 이렇게 추운데, 약속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연락 한 통이 없다.

사이.

해일: 날 무시하는 걸까? 아니겠지? 아닐 거야.

사이.

해일: 기분이 좋지가 않아. 이제는 내가 중요하지 않은 건가? 설마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아냐, 잠자코 기다려봐야지.

사이.

해일: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이렇게나 추운데. 행여나 늦을까 봐 택시까지 타고 왔는데, 바보가 된 거 같아.

이때 해일의 어깨를 툭 치며 등장하는 요원. 화들짝 놀라는 해일.

요원: 맞지?
해일: 네?
요원: 맞구나.
해일: 어? 어!

해일은 다시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요원: 여기서 만나네.
해일: 요원이니? 너 요원이 맞지?
요원: 그래. 맞아. 너도 내가 반갑구나?
해일: 너 진짜 요원이구나. 반갑지. 당연히 반갑지. 진짜 너무 반가워. 잘 지냈지?

요원은 벤치에 앉는다. 해일도 따라 앉는다.

요원: 춥다. 올해는 유독 더 추운 거 같아. 근데 넌 옷이 그게 뭐니?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
해일: 아? 춥긴 하네. 근데 많이 춥니? 그렇게나 추워?
요원: 아니,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너 말이야. 이렇게 추운데, 옷을 그렇게 입고. (멈칫) 그러게? 너 지금 밖에서 뭐 하니? 너 여전히 좀 이상하구나.
해일: 내가 이상해?
요원: 아니, 뭐 내가 널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행동을 하잖아.
해일: 사람들이 날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아니야. 그건 중요한 것도 아니야. 근데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하면 좋겠어. (사이)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요원: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니까. 너 이상하다고, 예전에 우리 학교 다닐 때 애들이 다 그랬잖아. 기억 안 나? 나는 물론 그렇게는 생각 안 했는데.

해일: 누가? 어떤 애들이? 걔들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떠들어. 나 친구도 없었어. 지들이 뭘 안다고 그래? 누가?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해? 친하지도 않으면서.
요원: 모르지. 그걸 다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 어쨌든 다들 그렇게 말하곤 했어.
해일: 너도? 너도 그렇게 생각해?
요원: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니까. 정말이야. 근데 오늘은 좀 이상하다. 그렇게 난리 치니까 좀 무섭기도 하고.
해일: 이상해? 나 오늘은 이상해? 오늘만 이상한 거지?
요원: 아니. 너무 춥잖아. 이렇게 추운데, 벤치에서 이러고 있는 게 이상하잖아.

해일 처량한 표정 짓는다.

해일: 그냥, 그냥 누굴 좀 기다리고 있었어.
요원: 누구? 여자?
해일: 아니, 여자는 무슨, 그냥 선배. 아는 선배랑 만나기로 했어.
요원: 선배? 우리 학교 선배?
해일: 응, 선배. 너도 알겠다. 학교 선배니까.
요원: 대학 선배들, 뭔가 다 징그럽다. 그렇지 않아? 뭔가 더러워.
해일: 그래? 그런가? 그래도 이 형은 정말 좋은 사람인데.
요원: 그런 사람이 이렇게 추운데 기다리게 해?
해일: 일이 있나 봐. 아마도 그런 걸 거야. 이 형은 정말 좋은 형이거든.
요원: 전화해 봐.
해일: 어? 그럴까? 그래볼까? 그래도 되겠지?
요원: 안 될 게 뭐 있어? 야! 전화하기도 힘든 사람인 거 같은데, 그런 사람이 뭐가 좋은 사람이니?
해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좋아, 전화해 볼게.

해일은 언 손으로 전화를 건다. 전화 연결되지 않는다.

요원: 이렇게 추운데, 봐봐! 입김이 막 나오잖아. 그런 데도 좋은 사람이라고?

해일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인다.

해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요원: 그래서?
해일: 그래서라니?
요원: 아니! 그런데도 계속 기다릴 거야?
해일: 그래야겠지.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요원: 그래. 그게 맞긴 하지. 근데 늦었잖아. 연락도 없고. 연락도 안 받고. 무엇보다 너무 춥잖아. 우리나라는 너무 추워. 다른 나라랑 비교하면 너무 추워.
해일: 다른 나라는 이렇게까지 안 추워?
요원: 뭐 그렇지. 다른 나라 안 가봤어?
해일: 어, 가본 적은 있는데. 추울 땐 가 본 적 없는 거 같은데.
요원: 추울 때 가 본 적이 없구나. 하여튼 우리나라는 너무 추워.
해일: 너는 어딜 가봤는데?
요원: 나야, 뭐 여기저기 많이 가봤지. 또 갈 거야.
해일: 또? 어딜?
요원: 어디긴 다른 나라지.
해일: 너 멋있게 사는구나.
요원: 아니, 그렇지도 않아.

짧은 사이.

해일: 그럼, 어디 잠깐 들어갈래?
요원: 시간이 있는지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해일: 아, 혹시 시간 있어?
요원: 너는 참.

해일: 미안해. 그럼 우리 어디 들어갈까?
요원: 근데 그래도 돼? 사람 기다린다며.
해일: 연락 오겠지.
요원: 어디 들어갈 건데?
해일: 글쎄? 어디든 여기보단 낫지 않을까?
요원: 맞아. 여긴 세상에서 제일 추운 거 같아. 정말 그런 거 같아.
해일: 맞아. 벌써부터 이렇게 춥다. 근데 진짜 시간 괜찮아?
요원: 바쁘지. 엄청 바빠. 그래도 오랜만에 봤으니까.
해일: 그래? 그럼, 어디 들어가자. 따뜻한 곳으로 가자.
요원: 그래 어디든 여기보다 추울까? 일어나자. 빨리 어디 들어가고 싶다.

두 사람 주섬주섬 일어난다.

요원: 옷은 대체 왜 그렇게 입었데? 그렇게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 너 그러면 사람들이 정말 이상하게 생각한다니까?
해일: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사람들이 정말 날 이상하게 생각할까?
요원: 앞으로는 따뜻하게 입고 다녀.
해일: 근데, 그런 건 별로 안 중요해. 나는 네 생각이 더 중요해. 너는 그래도 그렇게 생각 안 하지?

두 사람 걷는다.

요원: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 근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게 꽤 중요한 거야. 나는 널 알잖아. 근데 사람들은 널 모르잖아. 사람들은 우릴 몰라. 겉모습으로만 판단한다니까.
해일: 아냐. 나는 그건 정말 별로 안 중요해. 네가 이상하게 생각 안 하면 돼. 나는 그게 중요해. 아니, 나는 그것만 중요해. 너는 나 진짜 나 이상하게 생각 안 하지? 그러면 난 조금 행복할 것 같아.

요원: 그래. 나는 너 이상하게 생각 안 하지. 정말이야. 믿어봐. 그래도 춥잖아. 여긴 너무 춥잖아. 아무래도 너무 추워.
해일: 맞아. 너무 추워. 조금 더 따뜻하게 입어야 했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요원: 어디 들어가면 따뜻해질 거야.
해일: 어디를 들어가야 할까? 우리 뭘 마실까? 따뜻한 것 마실까? 그래! 우리 따뜻한 커피 마시자?
요원: 좋아. 너무 좋겠다. 따뜻한 것 마시면 진짜 좋을 거 같아.

두 사람 서로 다정하게 바라본다.
이때 해일의 전화벨이 울린다.

해일: 네? 저 근처에요. 아, 기다렸는데, 안 오셔서.

해일 요원의 눈치를 살핀다.

해일: 네, 근처에요. 네, 진짜 얼마 안 갔어요. 네? 아, 그죠? 춥긴 한데,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해일 전화를 끊는다. 해일은 우물쭈물한다.

해일: 혹시 조금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요원: 가려고?
해일: 금방 끝내고 갈게. 어디서 만날까?
요원: 아냐. 내가 갈게. 그 벤치로 갈게.
해일: 벤치로?
요원: 응. 벤치로.
해일: 응, 그럼 벤치에서 봐.

요원 뒤돌아선다. 그러다가 다시 해일에게.

요원: 저기!
해일: 어? 왜?
요원: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나면, 술 마실래?
해일: 술? 술 마시고 싶어?
요원: 응. 술 마시면 좀 따뜻해질 거 같아서.
해일: 그래. 그러자. 우리 술 마시자.
요원: 그래. 조금 이따 봐.

요원 사라진다. 해일 사라지는 요원을 바라본다.
해일에게 햇살이 내린다. 해일은 몸을 비빈다.

-막-

김지훈

극작가. 무대에 올라간 작품으로는 <귀가>, <탁탁탁>, <아빠는 순찰 중> 등이 있다.
제37회 부산연극제 희곡상, 제9회 김문홍 희곡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