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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공간

주강식의 그때 그 시절 부산시조의 발자취와 모습

글·사진주강식

전국시조백일장 부산 중앙공원에서 초정 김상옥, 부산시조문학회장 주강식, 조계종 종정 성파스님, 1993

시조는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족문화의 주류를 이루며 금자탑을 쌓아오다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구화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짓눌려 침잠을 면치 못하였지만 그래도 명맥은 이어왔다. 1930년대 전국의 시조 시인은 십여 명 정도였지만 부산 경남 지방에서는 몇몇 시조 시인이 시조에 불을 지폈다. 탁상수, 김기택, 장응두, 고두동, 김상옥, 서정봉, 이영도 등이 그렇다.

탁상수는 1900년 경남 통영 출신으로 한때 충무여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1925년 『조선문단』에 「파랑새」, 「눈물」로 등단했다. 1926년부터 1927년 사이에 20여 편의 시조를 발표했으며 통영과 부산을 오가며 문학 활동을 펼쳤다. 김기택은 동래고보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926년 『개벽』지에 시조 논문을 실었고 『참새』지에 쇠뫼(鐵山)란 호로 수십 편의 시조를 실었다.

장응두는 통영 출생으로 1970년 부산에서 살다가 범일동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부산문인협회 부지부장도 역임하였으며 자유시를 쓰며 두주를 불사했다고 한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관란」이, 1940년 『문장』지에 「한야보」가 추천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조 활동을 시작했다.

고두동은 주로 부산에 살면서 통영 문인들과 교류하며 『참새』지에 참여했다. 김상옥은 통영 출생으로 통영과 부산에서 교편을 잡으며 중년 이후에는 서울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가 16살에 쓴 시조 「봉선화」는 1939년 『문장』지에 추천되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오랫동안 실렸다. 1941년 「낙엽」이 동아일보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는 시, 시조를 쓰며 글씨, 그림, 전각, 도자기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서정봉은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1952년 동시집 『반딧불』, 1953년 시조집 『소정시초』, 1969년에 『여백 앞에서』를 출간하였다. 그는 일제에 항거하다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영도는 경북 청도 출생으로 1945년 「죽순」, 「제야」를 발표하고 1954년 시조집 『청저집』, 1968년 『오누이 시조집』을 출간하였다. 여기서 오누이는 그와 이호우 시조 시인이다. 그는 통영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부산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청마 유치환과의 로망스와 그 일에 관한 글은 많은 이의 입에서 회자 되었다. 일제와 6.25 동란 속에서도 이들은 부산, 경남 지역에서 시조 작품 활동에 정진하며 향긋한 시조의 꽃을 피워올렸다.

위에 언급한 사항이 부산 시조의 근간을 이뤘다면 현대로 이어지는 발전은 살매 김태홍 시인의 업적을 빼놓을 수 없다. 김태홍 시인은 자유시를 쓰면서 민족시로서의 시조의 가치와 전통성을 높이 인식하고 부산시교육청 장학관으로 근무하면서 시조짓기 운동을 펼쳤다. 부산시교육청 산하의 교사들에게 시조짓기 작품을 공모하여 시상하고 그 작품을 『돌림그네』라는 작품집으로 엮어냈다. 수상자에겐 우수 3점, 우량 2점, 가작 1점의 승진 가산점도 붙였다.
그때 교감 승진을 하는 데에는 0.1의 차이가 변수를 만들기도 하였다. 1점은 큰 변수였다.
필자도 그때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응모하였더니 우수 2회, 우량 3회, 가작 2회를 수상했다. 친구들이 대필을 요구하기까지도 했다.

그때 우수상을 받은 사람들이 시조 동인 <볍씨>를 결성했다. 필자는 우수상 등을 받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창립 멤버로는 동참하지 못하고 2년여 지나 입회했다. 신입 회원으로는 처음이었다. 창립 회원 8명에서 회원은 모두 9명이 되었다. 내가 입회하고 나서 2~3년 지난 사이에 양원식, 백승수 시인이 가입했고 회원은 모두 11명이 되었다. 그때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려면 기존 회원 전원의 동의가 있어야 했으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허락되지 않았다. <볍씨> 동인들은 한 달에 회비 1,000원을 내어 매달 식사 모임을 갖고 국밥에 소주 한잔을 하며 문학 활동과 우의를 다지며 가족 나들이도 하였다. <볍씨> 회원들은 1980년부터 매월 『부산시조』라는 제호의 회보를 발행하여 전국의 시조 시인과 관계 요로에 배포했다. 한 번에 500부 이상 발행하여 우송했는데 그때는 컴퓨터는커녕 타자기도 드물어 손글씨로 회보를 작성하여 출판사에 의뢰하여 인쇄했다. 봉투와 주소, 우편 번호까지 일일이 작성하여 우체국에 가서 하나하나 우표를 붙여 발송했다. 원고 청탁 관계, 전화비며 교통비, 식사까지 담당자가 흔쾌히 부담했다.

시조 연수회, 시조 낭송회, 시화전도 열었다. 모두 시조를 쓰는 것, 시조 활동을 보람으로 여기며 성의를 다 하였다. 전국 시조 시인들에게 회보를 보내면 격려의 편지와 엽서가 많이 왔다.
필자가 가야동에 살 때 <볍씨> 총무 일을 맡았는데 전국에서 한 달에 수십 통의 우편물이 오고 가니까 정보기관에서 요시찰 인물로 주시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은상, 이태극, 김상옥, 정완영, 이우종, 이형기 등의 많은 문인의 격려가 있었다.

<볍씨>의 활동 영역이 크게 넓혀진 것은 성파시조문학상의 제정과 성파시조백일장을 개설하면서였다. 부산일보 이진두 기자의 소개로 우리 회원이 그때 서운암 주지이자 현재 대한조계종 종정이신 성파스님을 찾아가서 지원을 부탁 드렸더니 흔쾌히 응해주셔서 1984년 가을부터 제1회 성파시조문학상을 부산일보 강당에서 시상했다. 지난해까지 38회 되도록 매년 실시했다. 성파시조백일장은 1985년부터 매년 해왔다. 성파스님은 시조뿐 아니라 도자기, 그림, 서예, 다도, 천연 염색, 한지 만들기 등 많은 분야의 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직접 참여도 하며 도움을 주고 있다. 주로 전통문화에 관심을 많이 가지신다.

<볍씨> 동인 활동은 또 하나 얘깃거리가 있다. 화전 시화회다. 1987년 진달래 꽃맞이로 통도사 계곡에서 진달래꽃을 따서 화전을 붙여 먹는 놀이를 하다가 1989년부터 부산 여류 시조 시인도 동참하였다. 1993년부터 부산여류시조시인협회에서 주관하고 있다. 시조 연수는 주로 교사들을 대상으로 1986년부터 <볍씨>가 시작하여 오다 시조시인협회에서 이어오고 있다.
부산시조의 활동 영역을 크게 넓힌 것이 또 있다. 부산시조시인협회의 발족이다. 기존의 동인 <볍씨>와 부산여류시조시인, 여타 부산 시조시인들을 합해 1984년 부산시조시인협회를 만들었다. 전 부산일보 사장이셨던 김상훈 시인이 초대 부산시조시인협회장을 맡아 큰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전국시조 단체에서 부산시조가 단연 두드러지게 단합하고 활력을 보였다. 성파스님, 김상훈 시인의 부산시조 발전에 기여한 노력은 잊힐 수 없는 공덕이다.

시조는 우리 전통문화의 금자탑이고 미래의 문학으로서도 빠질 수 없는 전통과 문학적 요소를 지닌 문학 장르이다. 시조 문학의 세계화, 시조 문학의 굳건한 발전을 위해 필자는 보람과 소명감을 절실히 느끼며 나에게 허여된 시간과 여력을 다하고 싶다.

주강식

1982년 시조문학 천료, 볍씨 동인으로서 부산문인협회 자문위원, 부산교육대학교 국어과 명예교수를 지냈다.
성파시조문학상, 부산문학 대상을 수상했으며 펴낸 시조집으로 『태산을 넘는 파도』, 『활주로』, 『황금률 넘어』, 『우듬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