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양나영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베를린으로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니 거짓말처럼 한국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국제적인 도시라더니 정작 로컬 슈퍼마켓에선 영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웠고, 점차 내가 ‘진짜 독일’에 왔구나를 실감했다.
레지던시에 지원한 이유는 순전히 독일에 가기 위해서였다. 몇 년 전 경험했던 독일의 차갑고 선명한 공기도 좋았고, 독일어의 발음과 지나치게 개념적인 특징도 마음에 들었다. 사실 작업과 관련된 이유가 가장 컸다.
작업의 소재로 집과 관련한 개인적인 기억에 대해 다루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사물의 외형을 재현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어느새 개념이나 은유를 특정 이미지로 나타내는 방법들을 실험하게 되었다. 작업이 변화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트라우마에 가까운 기억의 원형에서 멀어지며 마음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데 작업을 위해 억지로 기억을 상기할 필요가 없었다. 개인적인 경험과 강렬한 감정은 여전히 작업의 원동력이었지만, 기억을 재료처럼 여러 방법으로 다루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역사의 트라우마, 특히 홀로코스트와 연관된 연구를 접하게 됐다. 특히 과거의 불의, 고통, 억압과 죽음과 관련하여 발터 벤야민이 과거, 역사를 구원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부분은 개인적인 기억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 그가 제시한 은유로 잔해나 파편 조각은 특정 이미지를 연상시켜 외형적인 재현 방법을 넘어서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현재는 거대한 역사와는 너무 멀리 있는 느낌이었다. 사적인 기억보다 역사적 트라우마의 범위는 훨씬 깊고 어두웠다. 그저 방법론만 작업에 적용하는 것 같은 윤리적 고민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해외 레지던시 파견지원 사업 공고를 보게 된 거다. 지원서에 고민을 그대로 적었다. 이렇게 솔직한 지원서는 내가 봐도 처음이었다. 당장 내가 독일에 3개월을 간다고 해도 외국인, 어쩌면 관광객의 관점에서 그 도시를 대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일단 독일에 도착해 그곳의 사람들과 내 고민을 얘기해 본다면 이전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도착한 지 나흘 만에 ‘Introduction Session’ 시간을 가졌다. 서로의 작업에 대해 공유하는 자리였다. 딱딱한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가장 편한 모습으로 서로의 작업에 대해 거침없이 질문했다. 그게 무례하다거나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위 말해 피 터지는 크리틱같지도 않았고, 작업을 더 이해하고 싶어서 던지는 환영의 질문 같았다. 내 작품 발표에서는 부산의 도시 장면을 재현한 구성에 관심을 보였다. 작업이 추상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흔적과 기억의 연구에 대한 부분도 그 깊이를 존중해주는 것 같았다. 대체로 분위기가 가벼웠기 때문에 여길 오고 싶었던 가장 큰 고민은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
2주가 채 지나기 전에 이곳 레지던시 출신 큐레이터가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했다. 내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내가 가지고 있는 걱정에 대해 바로 파악했다. 그리곤 명확하게 특정 사건에 대해 언급할 게 아니고 특정 아카이브나 개념, 이미지 등 거기서 오는 느낌을 참고할 수 있다고, 흥미로운 지점으로 발전할 거라고 격려해줬다. 많은 자료를 참고한 결과가 추상적인 이미지로 나오는 부분도 좋게 봐줬다. 이런 지점을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 해서, 무턱대고 여기 사람들과 많이 얘기하는 수밖에 없지 않냐고 했다. 후에 내 포트폴리오 발표를 들었던 인턴이 가족 이야기를 해주며,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독일의 역사가 자기 가족들이 겪었던 실제 삶이라고 했다. 유대인 친구를 소개시켜 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인턴은 폴란드에서 온 사람이었다. 다음에 다른 작가들과 함께 동독의 감시 사회에 대한 생생한 자료와 정보를 담고 있는 ‘Stasi Museum’에 가보기로 약속했다.
다음 날, 하루 반나절을 베를린 장벽 주변을 둘러보는 데에만 썼다. 기억에 관한 특정 사유를 이미지로 드러내는 데 사용했던 파편과 더미들이 여기엔 역사라는 이름 아래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공원에서 진중하게 아카이브를 읽어나가기도, 한없이 뛰어놀기도 하고 그저 가만히 누워있기도 했다. 날씨가 좋아서 더 미묘했다. 그러면서도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정신이 부러웠다.
자신을 넘어서 주변 환경을 반영할 준비를 하는 것. 레지던시 기간 동안 실마리를 얻고 싶은 부분이었고, 심사평에서 언급했던 여기서 날 뽑아준 이유이기도 했다. 3개월은 이 모든 걸 소화하기에 참 짧은 시간이다. 아니, 감각하기에도 부족하다. 벌써 한 달이 지나간다. 남은 기간 동안 씨름하는 주제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 다음에는 3개월이 아닌, 최소한 1년 아니 더 긴 기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
양나영
회화를 기반으로 입체, 발견된 오브제를 다루며 기억에 관한 여러 방법과 매체를 실험 중이다.
과거의 경험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가능성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