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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일상, 고요하지 않은 하루

이슬기

일곱 살 때부터 부산에 살았으니 어디 가서 부산 토박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지척에 바다가 있고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걸어서 다다를 수도 있다. 부산은 인구수는 서울보단 (현저히) 적으면서 도시가 지닌 편의를 맘껏 누릴 수 있다. 물론 다양한 예술이나 문화생활을 만끽하기엔 부족한 면도 있다. 그러나 평소에 나는 밖을 돌아다니기보다 반려 고양이 두 마리와 책에 둘러싸인 집에 머무르기를 선호한다. 출퇴근하는 직장인의 삶 대신 노트북만 있다면 어디서든 일하는 삶을 산다. 규칙적으로 외출하지도 않고 여행도 즐겨하지 않는 나의 일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고요함’이다. 예전에 어떤 이가 내 글을 읽고 잔잔한 호수 같다고 말했다. 삶의 경험이나 분위기가 글에도 비슷하게 묻어나는 걸 테지. 어쨌든 내가 외출하거나 다른 지역을 가는 게 흔한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얼마 전 여러 이유로 서울에 다녀왔다. 그보다 전에 나는 한동안 서울에서 출판인들이 모여 토론하고 배우는 연대모임에 참석했었다. 3개월 동안 매주 있던 정기 모임이 끝난 후 한 달 만에 후속 모임을 갖기로 한 참이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즐겁고 유익했기에 제아무리 시간과 비용이 들어도 만나고 싶었다. 게다가 서울에서만 진행되어 아쉬웠던 출판마케팅 강연도 같은 날 열렸다. 여기에 D작가님의 개인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다. 마지막으로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 만날 약속까지! 이 모든 일정은 한 동네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어쩌면 평소보다 많은 사람과의 만남에 과부하가 걸릴지도 모르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들뜬 기분으로 다이어리에 일정을 고정했다.

‘지방러’이자 ‘집순이’이기도 한 나에게 그야말로 ‘가심비’ 넘치는 하루였다(집 친화적 인간이 한 번 외출할 때 모든 일정을 다 본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부산역에 9시쯤 도착해야 해서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나도 지하철을 탔다. 평소에는 이 시간에 움직일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오랜만에 겪는 러시아워가 신선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결코 반갑지는 않았다. 6월 초였지만 일찍 시작된 더위에 여름교복으로 얇은 반소매 티셔츠와 널널한 품의 긴 바지를 입었다. 여기에 운동화와 백팩을 메고 있으니 출근하는 지하철 풍경에서도 나만 왠지 튀는 그림 같았다. 원래 버스를 더 좋아하지만 도착 시간이 일정한 건 지하철만한 게 없다. 덕분에 여유 있게 부산역에 도착했다. 두 시간 반 동안 KTX 열차를 타는데 커피는 필수다. 텀블러에 커피를 담고 만족스럽게 열차 플랫폼으로 향했다.

나는 평소에는 길치지만 스마트폰 안의 지도애플리케이션과 함께라면 서울 어느 곳이든 척척 찾아갈 수 있다. 첫 번째 일정인 전시회를 보러 가기 위해 북촌으로 향하는 마을버스 정류장도 금세 찾았다. D작가님의 작품을 보러 가는 길은 설레면서도 긴장되었다. 실은 살면서 전시회를 본 경험이 손에 꼽는다. 그럴 기회도 마땅치 않았고 일부러 찾아볼 만큼 관심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멋지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까? 어설프게 무지가 드러나진 않을까? 걱정했다. 근데 이건 거짓말이다. 나는 그림을 잘 볼 줄 모른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그림은 보는 게 아니라 그저 느끼면 된다는 것을 안다.

전시회가 열린 ‘갤러리한옥’은 다섯 평 남짓할까. 동네 작은서점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출입문 바로 옆에 난 정사각형의 큰 유리창이 D작가님의 앉은 모습을 비추었다. 나는 길 반대편에 서서 몰래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들어가자마자 D작가님은 나를 반갑고 애틋하게 맞아주었다. 부산에서 여기까지 힘들지 않았냐면서. 나는 “에이, 전 안 힘들었어요. 달리는 기차가 힘들었죠!”라며 아재 개그를 선보였다. (까마귀 효과음) 오기 전에 북촌 골목을 구경하며 걸어오느라 땀을 좀 흘렸다. 전시회 공간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지만 더위를 참기엔 버거웠다. 시원한 커피가 절실해져서 잠깐 나갔다 오려는 나를 작가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작가님께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꼴이 되었다. 작가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몸의 열기가 식기를 바라며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D작가님과는 출판인 연대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혼자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글도 쓴다는 점에서 나와 비슷하다 생각했고, 자연스레 친밀감도 싹텄다. 어느 날 친구를 잃은 계기로 그림을 시작했다는 그는, 생업을 하는 틈틈이 창작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아크릴 물감으로 색색이 표현된 그림을 보면서 D작가님은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롯하게 한 작품, 한 작품 마주 보고 서서 그저 조용히, 눈으로 색과 형태를 좇으며 말 없는 대화를 해나갔다.

노란색 가득한 하늘과 초록색으로 뒤덮인 땅이 그려진 작품은 유독 맘에 드는 것이었다. 커다란 잎사귀가 하늘로 솟아날 듯 뻗쳐 있었지만 동시에 흩날리는 느낌도 들었다. ‘석별’이라는 제목과 사라질 것 같은 잎사귀는 무언갈 그리워하는 작가님의 슬픔인 걸까. 곧 커피를 들고 돌아온 작가님은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 생각들을 정성스레 이야기해 주었다. 한 바퀴 돌아본 뒤 다시 ‘석별’ 앞에 섰다.

“저는 사실 그림을 볼 줄 모르는데요, 그런데도 이 그림이 제 맘에 쏙 든다는 건 알겠어요.”

그러자 그는 예의 맑고 어여쁜 두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말했다.

“신기하게도요, 다른 분들도 대부분 이 그림이 가장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작품은 원래 다른 그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의 형태가 얼핏 보인다. D작가님은 그림을 그리면서 힘들기도 한 순간도 지나왔다고 했다. 그렇게 기존에 그린 것을 흰색으로 다시 덮었다. 그의 말과 그림이 겹쳐 하나로 들리며 지난날 내가 모르던 시간들이 그려졌다. 우리는 천천히 오랫동안 같은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낮고 부드러운 D작가님의 음성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단단함이 느껴지고 편안하게 들려온다. 우리의 대화는 바깥으로 튕겨 나가지 않고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출판마케팅 강연을 듣기 위해 15분가량 걸었다. 곧 강연장에 가면 사람들로 붐빌 테고, 다음에도 예정된 만남이 여러 개였기에 짧게나마 혼자 걷는 시간이 더욱 소중했다. 앞으로 남은 일정에서 지치지 않게 에너지도 비축하고 앞서 본 전시회도 차근차근 곱씹었다. 강연은 두 시간 반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실무자의 출판마케팅 노하우에 저절로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멀리서 올라와 들을 만했다. 강연이 끝나고 연대모임을 하는 동료들과 함께 또 걸었다. 한 동료의 사무실에 도착해서 앞선 마케팅 교육에 관한 느낌, 현재 출판 시장에 관한 이야기, 곧 있을 도서전 행사에 대한 아이디어로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 나는 외출한지 거의 한나절이 다 되어갔고 사회적 에너지도 슬슬 고갈되려는 찰나, 마지막 만남으로 향했다.

Y와 H는 몇 해 전 글쓰기 모임에서 알게 된 동갑내기였다. 사는 지역이 달라 자주 보지 못했다. 우리는 직장과 사회생활의 애환, 요즘 일상을 지탱하는 취미 들로 회포를 풀었다. 전통주가 유명한 가게 안은 조명이 차분하게 내려앉아 한눈에도 꽤 고급진 분위기를 자아냈다. 혼자 일하는 사장님은 정성스레 만든 요리를 내어 올 때마다 친절하게 먹는 법을 설명해주었다. 동굴 같은 목소리가 좋기도 했지만 부산 말씨와 다른 조곤조곤함에 속으로 신기하게 느꼈다.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 친구들에게 물었다.

“근데 이 동네는 원래 노포가 유명하지 않아?”

“안 그래도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런 데 가면 힘들어. 너무 시끄러우니까 소리치지 않으면 말이 안 들린다니까?”

우리는 다함께 웃었다. 맞다. 우리도 이제 왁자하게 떠드는 곳에선 기 빨리는 삼십대 후반이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KTX 열차 안에서 나는 말 그대로 뻗어버렸다. 술기운도 있었지만 움직일 에너지 한 톨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서울에서 만난 여러 사람과 보낸 시간과 대화는 오래도록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다. 고요하지만은 않았지만 과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잔잔한 호수 위의 표면이 잔물결을 이루며 움직이듯 조용한 희열이었다. 어떤 이들과는 함께 있어도 혼자 있을 때처럼 고요한 평화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 순간은 어떤 위험도 불안도 없다. 꼭 감정이 눈에 띄게 크게 드러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잔잔하면서도 클 수 있다. 마음이 조용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뜬다.

이슬기

작고 따뜻한 이야기를 텍스트로 담아내는 출판사 ‘글이’의 발행인이자 『일인분의 삶』, 『그래서 운동』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