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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공간

나광자의 그때 그 시절 피아노와 함께 한 시간들

글·사진나광자

1976년 서울 국립극장에서 국립교향악단과의 협연

1960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했을 때 피아노 연습실을 생각해본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관악 캠퍼스로 종합대학교 안에 같이 있지만 내가 다닐 때는 을지로 6가에 있었다. 서울약학대학이 쓰던 건물을 물려 받았다고 들었다. 4층 연습실은 비교적 방음도 되고 연습하기엔 불편이 없었지만 놀라운 것은 연습실 피아노였다. 지금은 우리나라 국산 피아노가 버젓이 생산되고 있지만 그 당시(1960년)만 해도 국산 피아노는 생산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들여온 피아노로 주로 일본에서 제작된 야마하(YAMAHA) 혹은 가와이(KAWAI) 피아노가 대부분이었고 유우롭 피아노가 어쩌다 눈에 띌 정도였다. 음악대학 연습실 피아노는 6.25 전쟁 때 외국에서 연합 군인들과 함께 들여온 피아노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수선하고 조율을 해서 그나마 소리는 나는 데 건반은 낡아빠져서 움푹 파이기도 하고 건반 표면이 뜯겨나간 피아노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연습실을 만나기가 어려워서 아침 일찍부터 연습실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대학교 1학년 때의 추억이다. 낡고 헐은 피아노일망정 좋은 소리 내는 법도 연구해봤고, 여러가지 기교법, 운지법 등을 연마했던 기억이 새롭다. 음악대학을 설립할 당시 전쟁 후 열악한 우리나라 실정을 생각해 본다면 얼마나 선배, 교수님들이 어렵게 마련한 피아노였을까 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교수님 방에는 막 생산된 업라이트 국산 피아노가 깨끗한 건반을 자랑하고 있었다. (국내조립 ottotein piano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55년경부터 외국 부품을 수입해다가 국내에서 조립하여 피아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한다. 그러다가 1960년에 삼익피아노에서 호루겔피아노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연이어 1963년부터 영창피아노사에서 영창피아노가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그랜드 피아노까지 생산하면서 이 두 악기 회사는 거의 같은 시대 태어나 지금껏 한국음악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70년 대에 산업발전과 더불어 피아노 인구가 늘어나고 각 대학에 음악대학이 설립되면서 국산 피아노 생산이 성황을 이루게 된다. 한때 초등학교 1학년 교실 학생 대부분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시기도 있었다.

1965년 내가 부산에 왔을 때는 부산 시내에 시발택시라는 국산차가 택시구실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서울 살다 내려온 나에게는 서울의 환경과 너무 격차가 보여서 당황하기도 했다.
시집올 때 호루겔 피아노 한 대가 내 신혼살림 중 제일 값비싼 재산이었다. 지금도 고급 그랜드 피아노는 왠만한 집 한 채 값이지만 옛날엔 피아노 1대가 집 한 채 값이라는 말이 흔한 말이었다.

1960년이 지나면서 부산에서도 비로소 대학 내에 음악과가 신설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경성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여자초급대학에 음악과가 설립되었고, 동아대학교에, 그리고 신라대학교의 전신인 부산여자대학에 음악과가 신설되었다. 이 시절에 내가 부산에 와서 서양음악의 선구자 자리에 계셨던 부산 교수님들과 함께 일하면서 대학교수가 될 수 있는 행운도 따라 주었다. 1970년에서 2000년까지 근 30년간 국내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이 급격하게 많아지면서 국산 피아노 유통이 매우 활발해졌다. 외국으로 유학 가는 전공학생도 많아졌고 한국 내에서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열풍이 대단하였었다. 2000년 후 아파트 생활이 시작되면서 피아노는 가정집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고 피아노 학원이 점점 활성화되어갔다.

부산에는 지금의 시민회관이 1973년에 건립되기 전에는 공연장다운 공연장은 없었다.
모든 공연은 극장 혹은 학교 강당에서 열리고 있었다. 부산시립교향악단까지도 극장에서 연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65년 내가 부산에서 첫 독주회를 할때도 부산일보(옛 건물) 4층 강당에서 업라이트 피아노로 연주했다. 그리고 1976년 부산 시립교향악단과 시민회관에서 연주할 때 그랜드 피아노가 없어서 제자가 가지고 있던 그랜드 피아노를 빌려다 놓고 연주했다. 현재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 씨가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준우승을 했을 때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 연주회를 시민회관에서 하게 되었는데 연주용 피아노가 없어 어느 종교 단체의 피아노를 빌려다 놓고 연주한 기억도 있다. 이런저런 사연 끝에 드디어 시민회관에도 연주용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왔고, 홀 콘서트형 슈타인웨이 피아노가 비치되었다.

나는 이즈음 가은 아트홀이라는 이름으로 자그마한 연주홀을 만들었다. 1988년 남편이 상속받은 돈으로 남천동에 4층 건물을 사게 되었다. 그 건물 전체를 음악 시설로 바꾸기로 했다. 일본 동경 시내에 있는 야마하 건물처럼 꾸미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상가 건물이라 이미 들어와 있던 상인들을 모두 내보내고, 술집으로 쓰던 지하를 연주홀로 꾸미었다. 슈타인웨이 피아노를 들여놓았더니 그럴듯한 연주홀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사무실, 연습실, 강의실 등으로 4층 건물을 모두 채웠다. 국산 그랜드 피아노 4대, 업라이트 피아노 10대, 그 외 부대시설 등 내 재산을 다 털어 넣다시피 하였다. 이렇게 개관한 가은 아트홀에서 주로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의 연주를 꾸준히 열어주었다.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았던 시절이었지만 연주할 공간은 거의 없었다. 이런 실정이 안타까워 자비를 털어 만든 비록 작은 연주홀이었지만 그 시절 요긴하게 사용된 연주 장소였다.

그 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을 하면서 가은 아트홀에는 신경을 접었다. 오직 음악과에 연주홀과 연습실, 강의실을 갖춘 음악관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한 결과, 멋진 현대적 음악관을 짓게 되는 기적도 경험하였다. 음악학교를 꿈꾸었던 젊은 시절의 꿈이 이렇게나마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현재는 각 대학 연주홀은 물론 부산 시내 각 구청 문화회관에도 멋쟁이 연주용 피아노가 위세를 들어내고 있다.

사실 피아노라는 악기는 습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우리나라 기후에 적응이 어려운 결점을 가지고 있다. 비싼 피아노를 선호하는 만큼의 보관 능력이 따르지 못하는 실정이다. 수입해온 고가의 피아노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피아노 악기 제작 기술 뿐만 아니라 유지 관리 보관을 위한 노력도 함께 해나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쇼팽곡 cd음반 표지

나광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를 줄업한 후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 재직했다.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 교수재직 중 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국내외 20여회의 독주회를 비롯하여 협연, 반주 등 지금까지도 활동을 이어가는 현역이다. 2022년 회고록 『80년 세월이 가져다 준 선물』을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