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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술창작 원천을 찾아서

하경희

나는 진도전통민속음악을 연구하고자 2024년 4월 1일부터 진도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올 연말까지 살 예정이다. 나의 고향이자 대한민국 전통민속예술특구인 진도에서 예술창작 원천을 찾고자 함이다. 연구 시작은 대금국수로서 대금산조 창시와 진도 아리랑 편·제작한 진도전통민속음악의 뿌리인 박종기 선생의 예술 생애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연구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박종기(朴鍾基: 1879. 12.12 ~ 1941. 10. 30)선생은 무정 정만조에 의해 당대의 최고의 예술인으로 칭송받은 아버지 박덕인의 예술 유전자를 이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관료였던 무정 정만조는 47세 나이로 1896년 팔월역변(八月逆變)과 시월무옥(十月誣獄)에 연루되어 진도(珍島)에 12년간 유배되어 살았다. 당시 박덕인은 70세의 나이로 무속 활동을 하지 않은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무정의 외롭고 고통스런 유배 생활을 위로하기 위해 음악과 춤과 시로써 아름다운 두 예인(藝人) 간의 우정을 쌓았다. 이때 무정의 박덕인(朴德寅: 1827~1900)에게 바친 시를 인용하면 ‘아속청탁(雅俗淸濁) 완려애유 (緩麗衰愉)’ [이윤선 박사 해설: 고결하고 속된 것을 넘나들고 맑고 탁한 것을 가로 지르며 순결하고 우아한 것을 더불어 보듬고 슬프고 기뻐하는 것을 한가락에 담아내는 예술이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박종기선생의 가계는 세습무계인 박헌영의 둘째 아들 박덕인 그리고 박종기에 이르러 남도음악 명가로 절정기에 이른다. 그 후 후손들은 전남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에서 1980년대 말까지 씻김 굿 무속활동을 하다가 제주도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종기선생은 산조(散調) 뿐 아니라 제례곡인 심방곡(⼼房曲)등 에도 능하였고 판소리에도 조예가 깊어 대금산조에 판소리 기법을 도입하여 대금산조를 창시하였다. 그리고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의 중병에 자기살을 도려 약에 쓴 효행이 널리 알려져 1909년에 조정에서 내린 효행 상을 받았다. 때문에 박종기는 평시의 모습은 삼배적삼에 갓을 쓰고 다녔고, 다리를 절었다고 한다. 조선성악연구회(鮮聲樂硏究會)에서 활동으로는 기악연주와 교육에 힘썼으며, 제자로는 한주환(韓周煥)과 이생강 명인으로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에 많이 취입한 80여 편의 음반과 270여 회의 경성음악방송 출연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진도읍내 국악협회와 인류문화유산 무형문화유산 전수관 마당에 비석이 있다. 이보형,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7) (서울: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 박종기 유적조사 보고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그를 “박젓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박종기가 대금의 불세출의 명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태어난 주변의 풍수는 반경 10리를 기준으로 산세와 지형을 보면 왼편으로 여귀산(⼥貴⼭)은 탄금산으로 선녀가 가야금를 타는 모습이며, 삼막리 뒷산이 안금산(按禁⼭)으로 신선이 거문고를 탄다는 산이요 앞 벌판으로 마주보는 고산리는 북매산 북형이고, 중매리는 쟁형으로 징의 모습이다. 장구포리는 뒷산이 장구형태 산이다. 그리고 1943년도에 개교한 광석국민학교 자리는 삼현취(三絃吹)자리이다. 박종기 명인 생가의 풍수지리로 보아도 국악과의 인연을 쉽사리 짐작케 한다. 경성방송국에서 1930년대 중반 국악방송을 담당하였던 이혜구는 박종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갓을 쓴 박종기가 대금 독주를 방송하러 방송국에 오면 의레 술에 취하여 얼굴이 불그스레 했다. 일본인 직원이 박종기를 가리키고, 저렇게 술 취한 사람을 방송실에 들어 보내도 좋으냐고 하였는데, 저 사람은 술 안 마시면 방송을 못한다고 설명했더니 그 말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다시 말이 없었다고. 진도 아리랑이 작곡된 경위는 김소희 명창과 김득수 명인 등의 증언에 의하면 유성기 음반 취입차 일본으로 가는 배위에서 박종기가 기존의 통속 민요 산아지 타령 등을 즉흥적으로 편곡하여 창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종기의 타계에 대해 판소리 고법의 인간 문화재였던 김득수는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16) 판소리 고법에 증언한 바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박종기 죽음은 김득수가 송만갑을 모시고 판소리 공부를 하는 동안에 완도 구경 갔다가 완도유지 잔치 집에 초대되어 연주를 하다가 타계 하였는데, 진도군 장례로 김득수가 진도읍 포산리 산에 모셨다고 한다.

아주 짧지만 진정한 예술인 박종기 선생 예술생애를 연구하면서 전통민속음악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부산문화재단에서 부산전통민속예술 악가무를 어린이무형문화재 교실로 개발한 일화가 생각났다. 2010년 부산광역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지정되고 당시 박소윤 부장과 나는 어린이무형문화재교실 첫 단계로 어린이 무형문화재 체험단을 운영하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에 부산문화재단이 창립된 지가 얼마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재단 설립에 중요한 목적에 지역문화정체성 정립이라는 것을 실천하는 사업으로 인식하였던 기억이 난다. 난 지금도 새로운 예술의 원천은 지역민속문화예술에 있다는 믿음은 그대로이다. 지역민속문화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살아 있는 전통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산문화재단 출신으로 부산문화재단이 예술가와 시민과 함께 항상 활기차게 정진하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하경희

2009년 재단창립과 함께 초대사무처장으로 입사, 부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장 등을 역임하였다.
2022년 정년퇴직 후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분야 전담심의위원, 글로벌 按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