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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공간

먼구름 단상

정재운

1953년 자유아동극장 건립 당시의 모습

부산은 ‘개항’과 ‘한국전쟁’이라는 근현대의 격변기를 통과하면서 원주민의 두세 배에 달하는 이주민이 모여들어 도시를 이룬다. 그들의 삶이야 전쟁의 명분과 이데올로기의 명령으로부터 멀찍이 이격돼 있었겠지만, 난리가 터지자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처지는 너나 할 것 없이 참으로 공평했다. 그렇게 부산은 임시(피란)수도가 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즈음 ‘부산성(釜山性)’이라 불리는 근대의 풍경 가운데 실향과 이산의 아픔이 직간접적으로 얽혀있지 않은 것 어디 있으랴 싶다.

전쟁과 피식민의 세월은 세계도시 부산을 수식하는 ‘Dynamic’이나 ‘Good’01이라는 추상명사와는 그 거리가 가늠할 수 없이 먼 것만 같다. 글로벌과 쌍생아인 자본의 광풍은 그 모든 세월을 옛날 속으로 밀어 넣어버리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옛날이 어딘가? 미래와 대칭적 시간인 과거는 현재와 달리 광막한 시간이다. 한 번 그 속으로 편입되어버린 옛날들은, 그것들의 육신은 시시각각 훼손되고 현재에 짓눌리거나 매몰되고 종내 흩어져버리질 않나. 그렇게 잃어버린 인간적 자취 혹은 순간들은 초현실주의자 브르통이 생투앙 벼룩시장(한물간 것들이 종착하는)에서 고색창연한 것을 발견하듯, 찰나의 언캐니한 순간 속에서만 되살아날지 모를 운명에 처하곤 한다.

필자는 ‘수 년 전’이라는 과거02 한때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위인동화를 썼다.03 <인물로 만나는 부산정신>이라는 시리즈의 대상 인물은 작가 섭외 전에 이미 정해져있었고, 나는 그제야 선생의 존함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시점으로부터 훌쩍 미래에 도착한 지금까지도 나는 나의 무지가 귀가 벌게지도록 부끄럽다. 먼구름 한형석은 국권피탈의 해, 경술국치에 나셔서 1996년 소천하셨다. 간단히 요약할 수 없는 선생의 생애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청년시절, 중국에서 벌였던 예술구국(藝術救國) 활동기였다. 덧붙여 귀국 후 해방공간에서 ‘자유아동극장’을 짓고, ‘색동야학원’을 열어 조국의 내일을 예비한 시기까지. 인생의 중반기부터 종반기까지는 통째로 누락된 셈인데, 이를 모두 담아내고픈 욕심을 깜냥이 따라가지 못했다. 부산 서구 해돋이로 297, 아직 개관하지 않은 어떤 극장 앞에서 나는 미망을 좀체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입춘(立春)과 우수(雨水) 사이쯤으로 기억한다. 절기상으론 완연한 봄의 진입을 알리지만 게으른 피부는 겨울을 벗지 못하던 그즈음, <‘한형석 자유아동극장’ 부민동에 복원 개관>04이란 제목의 기사를 접했다. 기사에선 사월쯤 공사를 완료하고, 임시개장을 거쳐 칠월 개관하기로 목표했다고 했으나, 이 잡문을 쓰고 있는 칠월 중순까지도 일부 공사는 진행 중이었다. 애초 2015년 극장 복원 완료를 목표로 추진했던 사업임을 떠올리면 며칠 더 기다리는 게 대수랴. 누가 부른 것도 아닌 걸음을 번번이 물리면서 하는 생각이란, 옛날에 내가 썼던 「먼구름 한형석-희망을 노래한 예술가」05의 도입부 장면이다.

그 소설(동화) 속에선 선생보다 백 년 뒤인 이천십 년에 태어난 유안이06가 등장한다.
아이는 아빠 손에 이끌려 부산 서구의 ‘먼구름 한형석 길’을 올라 자유아동극장 터에 당도한다. 극장이라고 해놓고, 잡풀만 무성한 폐가 앞에 선 유안이는 소략한 안내문을 만난다. ‘독립운동가’, ‘한국 최초의 오페라’ 같은 거대한 명명들도 아이에겐 그저 까마득한 말들일 뿐이다. 막대하게 자란 풀 무덤처럼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시간 때문. 물론 제아무리 시간의 힘이 세도 있었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거나, 없었던 일을 새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렇게 이미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과거는 필연이고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를 놓고 기억하고 해석하는 현재는 불확실로 가득한 가능태인 미래를 향해 언제까지나 개방되어 있다. 잠긴 문, 재탄생을 기다리는 극장 터에서 유안이의 귀에 어떤 노래가 들려온다. ‘우리 국기 높이 날리는 곳에’ 유안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다정한 아빠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다. 바람에 실린 노래의 정체는 한형석 선생이 작곡한 「국기가」07. 노래와 함께 시간이 멈추고, 잠긴 문을 열고 극장에 들어선 유안이의 눈앞엔 인형극이 한창인 무대가 나타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박하고 촌스러운 상상력이지만, 당시엔 꽤 참신하지 않은가라는 뻔뻔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눈을 붙잡기 위해선 그런 장치라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옛날을 헤적이는 일이란, 창피를 무릅쓰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느낀다. 그렇다고 그 무렵의 나를 위한 변명조차 마련 못할쏘냐. ‘영어교사’, ‘작가’, ‘배우’, ‘연출가’, ‘작곡가’, ‘독립운동가’, ‘군인’, ‘극장장’, ‘교수’… 믿기 어렵겠지만 한 사람이 입었던 직업들이다. ‘부산’과 ‘베이징’, ‘상하이’, ‘시안’, ‘충칭’, ‘칭다오’… 한 사람이 누볐던 생의 무대이며, ‘김구’, ‘장제스’, ‘지청천’08, ‘이범석’09 같은 당대 거인들과 항일의 한 길을 걸었던 선생에겐 ‘눌원문화상’,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같은 영예가 돌아갔다. 그런 선생의 생을 들여다보기 위해선 타임슬립 같은 알량한 디딤목이라도 필요했던 것 아니냔 말이다.

유안이는 시공간을 오가며 청년 한형석의 말과 사고, 행동을 좇는다. 본시 작가란 겪은 것만 쓰는 자가 아님을 모르지 않지만, 시대의 아픔을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이 어찌나 어렵고 죄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유안이가 필요했고, 그 방패 뒤에 숨어서 이런 문장들을 썼다. ‘1953년, 극장 밖은 전쟁의 포연이 채 다 흩어지지 않은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아이들의 순수마저 죄 가리진 못하는 모양이다. 그 시절, 전쟁통에 부모 잃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고아들은…’ 낯 두껍기도 해라.

개관이 미뤄진 극장 앞을 발밤발밤하다 서구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의 길과 장소들을 휘적휘적 걷는다. 졸지에 대도시 부산시민으로 거듭난 이들은 저마다 주어진 몫의 하루를 견디며 입에 풀칠을 했으리라. 나는 추체험의 한가운데에서 깊은 상흔 우에 딱지 얹은 무심한 세월에 잠겨들었다. 어제의 환난을 딛고 다다른 오늘, 어쩜 우린 그 시절, 옛날을 살아낸 모든 촌부들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 아닐까.
‘빚’이라는 말을 떠올리자, 자연히 ‘상환’, ‘이자’ 같은 말들이 따라온다. 지극히 속된 의식의 흐름은 쉽사리 따돌려지지 않는다. 읽고 쓰는 삶을 택한 주제에 가정을 꾸리고 집을 소유하기 위해 버둥거려온 필자 개인의 삶에서 연유한 사고의 파편들일 것이다. 아파트 거주민인 나는 과연 시간이 정지된 곳의 달동네 풍경들과 아무런 연결점이 없는 걸까. 현재란 과거와 외따로 떨어져 그저 존재하는 것일까. ‘자유아동극장’, ‘임시수도 기념관’, ‘아미동 비석마을’ 골목을 구석구석 밟는 동안, 잔가지를 뻗치는 잡념이 유난하다. 이즈음의 부산광역시라는 도시도 근현대사의 특정 국면 속 부산이란 공간과 이름만 같지, 짧은 시간에 이룬 큰 폭의 변화는 그 연속성을 지워버리지 않았나. 허나, 앞선 세대가 닦아놓은 물적-정신적 토대 없이 벼락처럼 오늘이 활짝 열린 것은 결코 아니리라.

한형석 젊은 시절

졸문을 보완할 요량으로 준비한 자료사진은 한형석 선생의 아드님인 한종수 님께서 보여주셨다. 선친의 삶과 높은 뜻이 시간 속에 부스러지지 않도록 혼신을 다하시던 선생의 모습이 선하다. 소설 집필 당시에 뵈었으니 그때도 이젠 옛날이 되었다. 모든 현재는 옛날로의 편입을 막아 세울 수 없다. 어떤 강렬한 기억도 당랑거철을 면치 못하지만, 그렇다 해도 밀려드는 부끄러움을 외면할 길 요원하다. 갚지 않아도 되는 빚은 애초에 빚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터. 상환 방법에 대해 생각하다 다소 엉뚱한 발상으로 귀착한다. 자유아동극장의 개관 날, 꼭 우리 집의 아동을 데리고 극장을 찾아야겠다. 이전 세대가 그랬듯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있으랴. 다만, 이타의 질서와 예를 갖춘 성숙한 사회를 향유할 때에야 비로소 이자까지 쳐서 갚아드리는 게 아닐까. 멀리 구름이 떠간다.

정재운

2022년 단편소설 「레이니데이」가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청소년소설 「먼구름 한형석」이 있다.

  • 01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을 열었던 2002년, 그 이듬해부터 작년까지 부산광역시의 브랜드슬로건은 ‘Dynamic Busan’이었다. 그러던 것이 2023년부터 ‘Big’(Busan is good)으로 바뀐다.
  • 02 하는 일마다 실속 없고, 앞으로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는
  • 03 희망이 없는 자가 쓴 글이 읽을 가치가 있을 거라고는 아무래도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글줄을 기워나가며 소망하던 바는 있었다. 내가 쓴 글을 읽은 (청소년) 독자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적어도 저자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 같은 허영 섞인 원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먼구름 한형석’ 선생의 생애에 기댔기 때문이다.
  • 04 손희문 기자, ≪부산일보≫ 2024년 2월 15일 기사
  • 05 「먼구름 한형석-희망을 노래한 예술가」(호밀밭, 2020)
  • 06 유안이란 이름은 청년기의 한형석 선생이 개명하였던 ‘한유한’에서 따왔다. 1933년, 산둥성 당읍현 소재 무훈중학교에서 예술 및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던 선생은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일제수사대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이후 산둥성 각지를 전전하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한서, 한희 등의 여러 이름을 사용한다. 그 무렵, 창작한 「신혁명군가」는 중국 전군에 보급되기도 하였다. 훗날, 이 다른 이름들에 의해 선생의 활동은 가리어지고 하마터면 묻힐 뻔 했으나, 중국의 한 교수의 발굴을 통해 한형석이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07 「국기가」는 이범석 글, 한형석 곡으로 광복군 제2지대에서 애국가처럼 불리었다. 「국기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 국기 높이 날리는 곳에 / 삼천만의 정성 쇠같이 뭉쳐 / 맹세하네 굳게 태극기 앞에 / 빛내려고 길게 배달의 역사’
  • 08 광복군 총사령관
  • 09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