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2024 공감그리고 여름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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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과정에서 흔적과 기억의 연구에 대한 부분도 그 깊이를 존중해주는 것 같았다. 대체로 분
위기가 가벼웠기 때문에 여길 오고 싶었던 가장 큰 고민은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
2주가 채 지나기 전에 이곳 레지던시 출신 큐레이터가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했다. 내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내가 가지고 있는 걱정에 대해 바로
파악했다. 그리곤 명확하게 특정 사건에 대해 언급할 게 아니고 특정 아카이브나 개념, 이미
지 등 거기서 오는 느낌을 참고할 수 있다고, 흥미로운 지점으로 발전할 거라고 격려해줬다.
많은 자료를 참고한 결과가 추상적인 이미지로 나오는 부분도 좋게 봐줬다. 이런 지점을 어
떻게 해결할 거냐고 해서, 무턱대고 여기 사람들과 많이 얘기하는 수밖에 없지 않냐고 했다.
후에 내 포트폴리오 발표를 들었던 인턴이 가족 이야기를 해주며,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독일
의 역사가 자기 가족들이 겪었던 실제 삶이라고 했다. 유대인 친구를 소개시켜 줄 수도 있다
고 했다. 그 인턴은 폴란드에서 온 사람이었다. 다음에 다른 작가들과 함께 동독의 감시 사회
에 대한 생생한 자료와 정보를 담고 있는 ‘Stasi Museum’에 가보기로 약속했다.
다음 날, 하루 반나절을 베를린 장벽 주변을 둘러보는 데에만 썼다. 기억에 관한 특정 사유를
이미지로 드러내는 데 사용했던 파편과 더미들이 여기엔 역사라는 이름 아래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공원에서 진중하게 아카이브를 읽어나가기도, 한없이 뛰어놀기도
하고 그저 가만히 누워있기도 했다. 날씨가 좋아서 더 미묘했다. 그러면서도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정신이 부러웠다.
자신을 넘어서 주변 환경을 반영할 준비를 하는 것. 레지던시 기간 동안 실마리를 얻고 싶은
부분이었고, 심사평에서 언급했던 여기서 날 뽑아준 이유이기도 했다. 3개월은 이 모든 걸
소화하기에 참 짧은 시간이다. 아니, 감각하기에도 부족하다. 벌써 한 달이 지나간다. 남은
기간 동안 씨름하는 주제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 다음에는 3개월이 아닌, 최
소한 1년 아니 더 긴 기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
양나영
회화를 기반으로 입체, 발견된 오브제를 다루며 기억에 관한 여러 방법과 매체를 실험 중이다.
과거의 경험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가능성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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