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 - 2024 공감그리고 겨울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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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식재료의 여리여리함이나 여름의 싱그러움, 가을의 풍성함은 그다지 조리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맛이 되는 것과 비교하면 겨울의 뿌리, 그 단단함은 요리에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이게 다 자연의 섭리 때문에 이렇게 됐다?
                                아니, 이렇게 유익한 이야기를 해 줘도...



                        날카로운 오 씨에게 어줍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국물이 다 졸아들기까지
                        아직 시간이 더 남은 것 같은데 초조해진다. 땅의 에너지가 쉽게 꺾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구차한 변명을 해 가며 얼른 조림 국물이 줄어들기를 빌어본다.


                        공연히 익지 않는 조림을 주걱으로 빙빙 뒤적거리다 문득, 모든 존재들은 억세지고
                        버티는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꼭 한 번은 밖으로 뻗어나가기를 멈추고 안에서 깊이를
                        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 같다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여름처럼 뻗어나가던 한때, 왕성하게 사람들을 만나며 사회생활을 하고, 일을 벌이고
                        수습하고, 치열하게 돈 벌고 해외여행을 떠나고, 그렇게 화려하고 번잡한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디어는 고갈되고, 관계에 치이고, 자신을 갉아먹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습에 온통 신경을 쏟았다는 느낌에 빠져들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쉬기는커녕 더 강한 도파민, 더 큰 자극으로 그 빈 곳을 메우려
                        더 열심히 활동했다. 채워질 듯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고
                        끝없이 달렸으며 그 결과 내 삶은 조금 설익은 듯 간이 어긋난 듯 풍미를 잃었었다.

                        혹시 그때 잠시 멈춰서서 깊이를 채우는 시간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내 안에 집중하고
                        뿌리를 키울 수 있었다면 조금은 덜 흔들리고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었을까.


                                우엉이 하나도 안 쓰고 향긋함만 남았네?
                                그치. 닭고기에도 은은하게 향이 배었고.


                        겨우 완성된 닭고기 뿌리채소 조림. 곰처럼 큰 오 씨가 어울리지 않게 뿌리채소 하나하나
                        섬세하게 맛을 느끼며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맥이 풀린다.
                        뿌리채소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키우는
                        시간을 보냈고, 자기 안에 응축시킨 에너지를 밖으로 풀어낸 결과..
                        오 씨의 영양분이 되었다. 안정적인 자연 순환의 과정을 목도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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