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 - 2024 공감그리고 여름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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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족문화의 주류를 이루며 금자탑을 쌓아오다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구화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짓눌려 침잠을 면치 못하였지만 그래도
명맥은 이어왔다. 1930년대 전국의 시조 시인은 십여 명 정도였지만 부산 경남 지방에서는
몇몇 시조 시인이 시조에 불을 지폈다. 탁상수, 김기택, 장응두, 고두동, 김상옥, 서정봉,
이영도 등이 그렇다.
탁상수는 1900년 경남 통영 출신으로 한때 충무여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1925년 『조선문단』에 「파랑새」, 「눈물」로 등단했다. 1926년부터 1927년 사이에 20여 편의 시조를
발표했으며 통영과 부산을 오가며 문학 활동을 펼쳤다. 김기택은 동래고보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926년 『개벽』지에 시조 논문을 실었고 『참새』지에 쇠뫼(鐵山)란 호로 수십 편의
시조를 실었다. 장응두는 통영 출생으로 1970년 부산에서 살다가 범일동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부산문인협회 부지부장도 역임하였으며 자유시를 쓰며 두주를 불사했다고 한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관란」이, 1940년 『문장』지에 「한야보」가 추천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조 활동을 시작했다. 고두동은 주로 부산에 살면서 통영 문인들과 교류하며 『참새』지에
참여했다. 김상옥은 통영 출생으로 통영과 부산에서 교편을 잡으며 중년 이후에는 서울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가 16살에 쓴 시조 「봉선화」는 1939년 『문장』지에 추천되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오랫동안 실렸다. 1941년 「낙엽」이 동아일보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는 시, 시조를 쓰며 글씨, 그림, 전각, 도자기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서정봉은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1952년 동시집 『반딧불』, 1953년 시조집 『소정시초』,
1969년에 『여백 앞에서』를 출간하였다. 그는 일제에 항거하다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영도는 경북 청도 출생으로 1945년 「죽순」, 「제야」를 발표하고 1954년 시조집 『청저집』,
1968년 『오누이 시조집』을 출간하였다. 여기서 오누이는 그와 이호우 시조 시인이다.
그는 통영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부산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청마 유치환과의 로망스와
그 일에 관한 글은 많은 이의 입에서 회자 되었다. 일제와 6.25 동란 속에서도 이들은 부산, 경남
지역에서 시조 작품 활동에 정진하며 향긋한 시조의 꽃을 피워올렸다.
위에 언급한 사항이 부산 시조의 근간을 이뤘다면 현대로 이어지는 발전은 살매 김태홍 시인의
업적을 빼놓을 수 없다. 김태홍 시인은 자유시를 쓰면서 민족시로서의 시조의 가치와 전통성을
높이 인식하고 부산시교육청 장학관으로 근무하면서 시조짓기 운동을 펼쳤다. 부산시교육청
산하의 교사들에게 시조짓기 작품을 공모하여 시상하고 그 작품을 『돌림그네』라는 작품집으로
엮어냈다. 수상자에겐 우수 3점, 우량 2점, 가작 1점의 승진 가산점도 붙였다.
그때 교감 승진을 하는 데에는 0.1의 차이가 변수를 만들기도 하였다. 1점은 큰 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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