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2024 공감그리고 겨울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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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5.    횡단보도 옆 보도블록

             무더운 여름이 한풀 꺾이고 살짝 차면서도 뜨듯한 공기가 섞인 가을바람이 강아지풀을
             살랑이고 있었다. 보도블록 틈 사이 노르스름하게 익은 강아지풀 한 무리가 있었다.

             강아지풀 이삭이 한올지게 잘 익어 패딩을 입은 듯 빵빵했다. 추수의 계절을 알리는 듯했다.
             이렇게 한자리에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꼭 터줏대감 같았다. 푸릇푸릇했던 조그마한
             강아지풀이 시간이 지나 노르스름하게 익어갈 수 있는 이유는 보도블록 밑 단단하게
             뻗어있는 뿌리 덕분이란 생각이 든다.



             2024.10.08.    비탈길 아스팔트 위

             아스팔트 위 강아지풀이 낙엽이 되어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다. 붉은 갈색빛을 띤 아스팔트
             위 황갈색의 강아지풀은 익고 있는 고추들 사이에 같이 말려지고 있는 모습 같았다. 가는
             가지들은 각진 직선에서 시작해 꽃으로 갈수록 곡선의 모습으로 끝나 있었다. 처량한 듯

             자유로워 보였다. 길가에 피어 있는 강아지풀을 보다 보면 똑같은 형태의 강아지풀이
             없다는 걸 느낀다. 하나의 이름 아래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인 것
             같다. 나 또한 하나의 몸 안에 다양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흥미로운 일이다.



             2024.10.12.    헌옷수거함 밑

             헌옷수거함 밑 틈에서 작게 피어나 있는 강아지풀을 보았다. 헌옷수거함 속 공간은 쓰임이
             끝나 또 다른 쓸모를 가지는 시작의 장소로 보였다. 각자에게 맞는 쓸모 있는 옷을 찾아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쓸모없는 것은 없다. 과거의 흔적들도 지금의 가치에는 쓸모가

             있다. 잠시 그 쓸모의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쓸모가 없어진 헌옷수거함 속 옷과
             강아지풀도 쓸모를 아직 못 찾았을 뿐이다.








                                                배하람
                       잡초를 매개로 한 회화, 사진, 설치 작업을 통해 생명력과 리좀적 연결망을 탐구하는 시각 예술가.
                           잡초뿌리를 재구성한 지도를 통해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삶의 가능성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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