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침에 보니 연둣빛 면류관을 쓰지 않은 나무가 없다. 밤새 긋던 봄비를 누가 감당해. 듣는 사람도 없는데 중얼중얼. 그러다 누가 놀래준 듯 턱이 떨어진다. 누구보다 아쉬워하는 자신이 낯설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내가?
혼란한 마음을 추스르자, 꽃 예쁜 줄 모르던 때의 나란 이는 어떤 사람이었나 묻게 된다. 그때의 그는 지금의 나완 너무 멀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과거란 미래와 대칭적 시간이며, 현재와 달리 아주 긴 시간이다. 옛날은 이미 일어났음에 필연이고 되돌릴 수 없다. 반면 미래는 가변이다. 이 광활한 과거에서 옛날이라는 특정한 기억을 솎아 내 보건대 젊어도 너무 젊었던 그에겐 제 안에서 흘러넘치는 싱그러움 때문에 삼사월 벚꽃이나 유채, 개나리와 튤립 따위 눈 둘 시간도 없었다. 어디 싱그러움 뿐이랴. 사용법을 모르던 관능의 괴롭힘 때문에 오뉴월 장미조차도 죄다 멀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력하게 그 시절을 부러워만 하냐고? 그럴 리가. 다시 말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다. 가까이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고 애정하는 일조차 해가 다르게 쉽지 않다. 갈수록 옛날의 중력이 더하다. 우주과학에 관해선 일자무식이지만,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다는 블랙홀의 중력이 밀집한 질량에 의한 것이란 정도는 안다. 그렇담 나는 얼마나 많은 기억이 집적되었기에 이토록 뒤틀린 시간과 공간 속에 놓이게 된 걸까. 이십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마지막 몇 해 동안 가까운 기억들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먼 시간 속을 헤매셨다. 그렇게 울었는데, 애도에 잡아먹혀 무너진 일상을 다시는 바루질 못할 것만 같았는데… 노구(老軀)에 갇힌 채 한없이 젊거나 어린 날들을 살았던 그녀의 모습마저도 너무 빨리 옛날로 편입되었다.
가끔 딸아이를 데리고 할머니를 보러 간다. 옛날의 밀도가 낮은 아이에게 왕할머니는 납골당 사진으로 기억될 것이다. 물결치는 주름은 얼굴에 난 모든 구멍을 숨기지만, 입속의 작은 어둠만은 가리질 못했다. 그 어둠이 없었다면 나조차 할머니의 웃음을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생의 단면을 포착하는 사진도 귀하지만, 구불구불한 입체를 더듬어갈 때 인생은 우리에게 더 많은 걸 알려준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할머니에 관한 기억을 들려주려 하지만, 딸은 제대로 듣질 않는다. 저 친구에게 나의 할머니는 너무 멀리 있는 모양이다.
계절이 바뀌어 옷가지를 정리하는 김에, 인형 친구들도 좀… 거기까지 했을 뿐인데, 아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너도 이제 초등학생이 아니냐, 라는 말을 차마 이을 수가 없다. 아이는 시위라도 하듯 집안의 모든 인형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곤 호명(interpellation)을 시작한다.
“주주!”, “미미!”, “스텔라!” …… 호명과 호명 사이에 인형 목소리로 대답까지 한다. “네.”, “오랜만이에요.”, “왜 불러요?” 점점 어질러지는 방 한구석에서 나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웬디!”, “줄리!” 우릴 처분하려 했다고? 인형들이 항의하는 것만 같다. 그때, 아이의 입에서 귀를 의심케 하는 이름이 불리었다.
“김지현!” 곧바로 아이는 노인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귀 안 먹었어!” 저 인형은… 못 본 지 한참이어서 몇 번의 이사 중에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그나저나… 저 친구의 이름은 왜, 라는 물음이 파문처럼 번져갔다. 동료 작가 중에도, 지난 학기 나의 강의를 수강한 학생 중에도, 아내의 지인 중에도 있는 김지현 씨들과 낡은 인형 사이의 거리가 아득했다.
윤동주는 계절이 지나가는 가을 하늘을 올려보며 별을 헨다.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어머니를 차례로 호명한다. 그러자 시인과 상관없던 망연한 하늘이 어머니라는 청자로 분한다. 돈도 없고, 힘도 약한 시인이 어머니께 드릴 수 있는 건 말의 아름다움뿐.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부른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도 부른다. 그에게 아름다운 것은 멀리 있는 것이다. 아스라이 먼 별처럼.
나는 또 한 명의 시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를 떠올린다. 필멸자로서의 인간은 자연의 시계를 거스를 수 없지만, 어떤 존재는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기도 한다. 누구보다 일찍 활짝 열린 근대에 살았던 시인에게 가장 큰 실존의 고통은 권태였다. 시인은 멈추지 않고 낯선 존재가 되어야 했다. 먼 곳으로부터 오는 향(香), 음식, 커피, 도자기, 우키요에… 이국정취와 환상.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사치와 아방가르드를 좇아 끊임없이 미끄러져 들었던 면면 역시 이 권태와의 싸움이자 도피였다.
두 시인을 경유하여 인형 김지현 선생에게로 돌아온다. 선생은 원래 아내의 벗이었다. 딸아이만큼 어렸던 그녀가 자라는 동안, 선생은 해져서 천을 덧댄 자리 빼곤 몸통의 색이 달아나 마치 발가벗은 꼴이 되었다. 그러니 사연 모르는 아이의 눈에도 주주나 미미로 부르기 어려웠겠지. 작명의 이유 따위 묻지 않아도 알겠다. 「별 헤는 밤」을 마저 읽으면, 시인은 호명한 것들이 단순히 멀리 있기에 아름답다고 느낀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머님 당신이 멀리 북간도에 계시기에 모든 먼 것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보들레르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구름처럼 대도시 파리의 이방인이라는 전에 없던 유형의 존재 방식을 스스로 부여했다. 질식적인 시계 시간에 인간의 유한함이 갇히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다. 익숙한 나를 낯선 장소로 데려가는 것과 익숙한 장소를 낯설게 보는 것이다.
가까운 것과 먼 것, 이편과 저편, 차안과 피안이 따로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김지현을 김지영이라 이름 붙일 순 있어도 엠마까지는 도저히 무리인 것처럼 엄연히 경계란 있다. 있는데, 슬며시 경계를 지워낼 때 그리운 어머니는 시인의 곁으로 오시고, 어떤 시인은 영원한 이방인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번 61호는 뭍과 바다의 경계를 쉼 없이 지워내는 파도 같은 기획들로 구성되었다. 해안 쓰레기 산책자, 이티씨 블랭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물화(物化)를 면치 못하는 우리네 삶의 무경계를 돌아보게 한다. 염포마을 예술캠프를 다녀온 신용철 님의 인상기 역시 예술을 비일상의 영역에 유폐시키지 않는 시골큐레이터의 따스한 눈길을 느끼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가 숨 쉬는 공간, 바사크라를 소개하는 지면도 얼마나 귀한지. 끝으로 <소통>에서는 조선통신사 축제를 조망함으로써 옛날 속에 박제되지 않고 새로이 쓰이고 있는 오늘의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