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노트

부산 동네 앓이

글. 박미라

라디오 작가를 20년 넘게 하면서 잊히지 않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중 하나. 이른바 ‘어느 동네’ 논란 사건(?)이다.

바야흐로 때는 1999년쯤, 가수 원미연 씨가 부산교통방송에서 DJ를 하던 시절. 전화 데이트 진행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 진짜 연결됐네. 반갑습니데이.”

부산스럽게 떠드는 중년 여성의 사투리에 원미연 씨가 부산 사투리를 흉내 내어 물었다.

“어머니, 많이 덥지예. 어느 동네 사십니꺼?”

“동래 살아요.”

“네, 어머니, 그러니까 어느 동네 사세요?”

“동래라꼬. 동래.”

“어머니, 그 동네를 말씀하시라고요.”

“동래라카이. 동래 몰라요? 동래.”

한참을 ‘동네’와 ‘동래’ 사이를 오가며 옥신각신하다 “그 동네가 그 동랩니더.”로 마무리되었고, 스튜디오에 있던 스태프들이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동래’를 지날 때마다 ‘동네’를 떠올리곤 하는데, 정말 ‘동네 같은 동래’가 되면 어떨까, ‘동래 같은 동네’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무슨 얘긴고 하니, 생각해 보면 동래는 참 동래다운 동네다. 오래된 동래부 동헌과 동래향교가 시간을 지키고, 동래학춤과 동래야류 같은 전통이 지금도 사람들과 호흡하고 있다. 동래를 동래답게 만드는 것은 오랜 세월 동네와 그 동네 사람들이 함께 문화를 지켜 온 결과다.

그럼 동래만 동네인가?

결코 아니다. 부산에는 저마다의 동래가 있다.

영도 앞바다의 수리 조선소를 보면 지금도 깡깡깡, 녹을 벗기는 소리가 나는 것 같고, 감천의 골목을 돌 때마다 만나는 오종종한 그림들은 또 어떤가? 전포의 힙한 카페와 기장의 싱싱한 해산물 등등등. 부산의 동래들을 자랑하자면 끝이 없다.

재미있는 건, 이 동래들을 정작 외지 사람들이 먼저 알아본다는 사실이다. 2026년 상반기만 부산을 찾은 외국인이 242만 명을 넘었고, 중화권 관광객 사이에서는 부산을 한번 다녀가면 자꾸 그리워 다시 찾게 된다는 ‘부산병(釜山病) 환자’들이 ‘부산 앓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급기야 부산시가 ‘부산병 치유 프로모션’을 추진했다고 하니, 가히 부산의 전성시대가 다시 도래한 듯하다. 남들은 이토록 병을 앓을 만큼 좋아하는 이 동네를, 정작 여기 사는 우리는 얼마나 좋아하고 알고 있을까.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 보면 문득 놀랄 때가 있다. 부산을 관통하는 간선도로 위에서 늘 마주치는 정발 장군, 다대포 장군, 송상현 부사의 동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매일 지나치는 풍경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 이름이 왜 붙여졌는지, 골목 끝 오래된 건물이 어떤 시간을 품고 있는지, 즐겨 찾는 공원이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지 선뜻 설명할 수 있는 어른도 많지 않다.

우리 동네를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알고 이해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동네 문화시설이 베풀면 어떨까?

미술관에 큐레이터가 있듯이 동네의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등 문화시설에 동네를 설명해 주는 큐레이터를 상시 배치할 수 있겠다. 오래도록 동네를 기록해 온 작가, 동네를 배경 혹은 소재로 활동하는 예술가, 마을을 연구한 향토사학자, 골목의 변화를 지켜본 주민이 큐레이터가 되는 거다. 이른바 ‘동네 큐레이터’가 동네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우리 동네의 예술은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

‘동네’와 ‘동래’를 헷갈렸던 그날 방송은 웃음으로 끝났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부산의 모든 동네가 저마다의 ‘동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동네. 그런 동네를 만드는 데 꼭 거창한 개발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이웃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듣고, 우리가 걷는 골목에 어떤 시간이 쌓여 있는지 알아가는 것. 어쩌면 부산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사는 동네를 제대로 앓아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산 동네 앓이. 꽤 오래 앓아도 좋겠다.

박미라
웹진 공감 그리고 편집위원이자 동화작가. 달콤, 쌉쌀, 오싹, 포근한 이야기를 찾아 오늘도 두 눈에 불을 켜고 모험을 나선다. 「그래서 북극항로가 뭐예요?」 「다정한 고랄라 목욕탕」 「별이와 북극여우」 「오만데삼총사의 대모험 1, 2」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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